하나하키 썼어요...
봄이었다. 아직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어서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찬 공기가 밀어쳤다. 목덜미로 파고드는 한기에 자연스레 인상이 찡그려졌다. 다음 수업이 있었나? 아직 학기초라 매번 시간표를 확인해야 했다. 액정을 누르는데 누군가 탁하고 어깨를 잡는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스가, 오랜만~
오이카와는 항상 저렇게 말하고 저렇게 웃는다. 잿빛 코트. 와인색 터틀넥. 나에게는 익숙한 것들. 익숙한 것들은 익숙한 정서를 가져온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다. 그러나 가끔 아주 특별한 찰나가 있다. 그 익숙한 것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찰나.
스가와라?
마치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는 듯이 그 익숙한 것들이 눈 앞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빛깔을 입는다. 정확히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표현할 수 없는데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 하얀 얼굴을 보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
그렇다고 당장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특별함은 강력하긴 했지만 그 전의 오랜 시간들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가로막았다. 말하자면 그건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 중 한 갈래였고 그 모든 갈래를 탐색하기에는 개강 직후라는 바쁜 일상이 쉴새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장 오늘 수업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일상이었다. 그런 시간들 안에서 그 날의 기억은 서서히 가벼워졌고 바쁜 일 주일을 보내고 난 후에는 그런 일은 없었다, 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그날의 느낌은 여전했다. 그건 조금 별난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라진 시간에서 파생된 감정의 밀도를 구하라는 문제가 있었다면 아마 풀지 못할 것이었다. 기나긴 생각 끝에 가벼운 한숨이 잠깐 떠돌았다. 단합 관련 안내를 띄우고 있는 핸드폰 액정이 깜빡였다. 반드시 참여하라는 오이카와의 메세지는 일견 부드러워 보여도 의외로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신입생을 만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래도 빠지기 힘들다. 대강 긍정하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대체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
회식 자리에 적당히 얼굴만 비추면 되겠지, 라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동기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끌려갔고 거기서 발을 적당히 빼지 못한 것이 지금의 결과였다. 눈 앞의 신입생은 잔뜩 얼어있었다. 이런 자리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조금 지친다, 라고 생각하며 눈 앞의 맥주잔을 내려다 보았다. 빠르게 이런 저런 얘기들이 치고 지나갔고 게임과 벌주가 여기저기에서 쏟아졌다.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는 건 어느정도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나는 그것조차도 버거웠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녹슨 곳이 넘쳤다. 저릿한 철냄새가 여기저기서 울렸다.조금 지친다, 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 뒤에서 목을 감아오는 팔에 중심이 뒤로 쏠렸다. 몸이 기울자 훅 하고 술 냄새가 끼쳤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 고개를 뒤로 젖혀 넘겨다보자 이미 꽤 마셨는지 얼굴이 붉었다. 잔뜩 기분이 좋은지 얼굴 구석구석이 웃고 있었다. 켁켁대는 빈 기침 소리에 목에 걸린 팔이 풀어졌다. 뭐야, 하는 볼멘소리에 오이카와가 잔을 흔들어 보였다.
“커플샷~”
시끄러워서 대화도 불가능한 와중에 신입생들이 신나서 구호를 넣는 소리는 선명했다. 과대라고 또 잔뜩 받아마시더니 이제는 벌칙까지 받아온 모양이었다. 여자도 아니고 왜 나야. 반쯤 짜증기가 섞인 질문에 실실대는 웃음이 돌아왔다. 우리 사이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잔뜩 늘어져 있다. 어깨를 잡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아무래도 곱게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팔을 떼어내고 진득하게 의자에 달라붙어 있던 몸을 일으키자 오이카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시선이 쏠리는 건 반갑지는 않았다. 의자를 짚고 선 오이카와의 고개 뒤로 팔을 겹쳤다. 쓴 맛이 단번에 목을 넘었다. 엑. 돋아오르는 소름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런 건 아무래도 별로인 것 중 하나였다.
잔을 내려놓고 팔을 풀었다. 이제 됐지? 그만 돌아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하자마자 열이 오른 얼굴이 목덜미에 확 가라앉았다. 닿은 부분이 뜨거웠다. 목을 감싸는 팔까지 전부 뜨거웠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너 괜찮아? 질문에 몸을 일으켜 세운 오이카와가 등을 팡 하고 쳤다. 괜찮아. 손을 내젓는 자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으로 다시 의자에 가라앉았다. 닿았던 부분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어쩌면 오이카와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나. 목 근처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럴리 없는데 속이 자꾸만 울렁였다. 마치 안에 다른 무언가라도 있듯이.
아무래도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이 정도면 얼굴은 충분히 비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옷을 챙겨입고 테이블에 인사를 했지만 웃음소리에 묻혀 몇 명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이런 자리에서 주목받는 것은 괜스레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인사하고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는데 뜨거운 손이 나와서 허리를 확 껴안았다. 오이카와였다. 벌써 가? 얼굴이 빨갰다. 그 얼굴에 핸드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벌써 열 시야. 나 들어가야 돼.”
가차없는 대답에 오이카와가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등께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이 닿는 자리마다 더웠다. 다음에 봐. 그제서야 손이 풀렸다. 잘 가라고 흔드는 손이 천천히 흔들렸다. 우중충한 공기 속에서 그 모습만이 선명했다. 운동화가 바닥에 직직 끌렸다. 어쩐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는 처진 표정을 생각했다. 같이 닿아오던 뜨거운 온도와. 손에서 전해지던 열기는 이제 몸 여기저기로 퍼져나가 심장 부근에서 자꾸만 열이 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언저리에 마음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열기는 차가운 봄바람에도 식혀지지 않았다. 그 특별했던 찰나가 스냅사진마냥 스쳐갔다. 이번에는 아마 모른 척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짙은 예감이었다.
*
집에 돌아와서는 학기의 끝을 찾아서 달력을 셌다. 그건 노력이었다. 인정하게 되면 아마 평범하고, 무난한 대학 생활은 박살나버릴테니까.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부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이용했고 말 수를 줄였다.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모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학기 초라서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별로 티가 나지 않았으니까. 이제 최대한 잘 피해다니면...
무슨 생각해? 눈 앞에서 오이카와가 볼펜을 흔들었다. 아니, 그냥... 애매한 웃음이 습관처럼 따라붙었다. 오이카와가 싱겁다는 듯이 픽하고 웃었다.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지. 학과 특성상 과끼리 수업이 겹치는 일이 잦았다. 아무리 피해가려고 해도 한 번 잡히면 도망갈 핑계가 별로 없었고 조별 과제라도 있으면 꼼짝없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상황도 그 일환이었다. 눈 앞이 탁했다. 앞에 놓인 하얀 화면만큼 머릿속이 막막했다.
빨리 하고 집에 가자.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자꾸만 숨이 막혔다. 뭔가가 목구멍을 가득 채우고 있는듯한 거북한 기분. 몸 안 속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했다. 뭔가가 자꾸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엑셀을 돌리는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힘이 잔뜩 들어가서 손가락 끝이 잔뜩 질려있었다.
“너 괜찮아?”
건네오는 말. 전해지는 시선. 내 앞에 앉아있는 너 자체.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건, 아무래도 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설명을 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냅다 화장실로 뛰었다. 치미는 거북함에 입을 벌리자마자 꽃잎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건 습격이다. 몸 안 어디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만큼 끝이 없었다. 마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고통이 격침했다. 손도 댈 수 없는 격통에 발끝이 경련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방금 토해낸 꽃잎만큼 선명했다. 애매한 종결형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이제 끝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누군가에게 차마 보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초라한 거였나. 자괴감과 기쁨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이 한켠에서 자꾸만 밀려들고 한켠으로 빠져나갔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이. 참담한 기분으로 입가를 대충 닦아냈다. 미처 닦여나가지 못한 꽃잎들이 짓이겨지며 곤란한 흔적들을 남겼다. 세면대에 물을 틀자 꽃잎들은 으깨지고 겹쳐지며 하수구로 흘러들어갔다. 그 꽃잎들은 그렇게나 아름다웠는데도 사라졌다. 사라지고 싶은 건 나인데도. 나는 아름답지 못해서 사라지지 못하는 걸까. 여전히 거기 서 있는 거울 속의 사람은 전에 없이 약해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오이카와에게 뭐라고 변명해야 할 지 막막했다.
“스가와라?”
숨을 고르는 모습은 예상보다도 빨랐다. 사실 이상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눈 앞에서 뛰쳐나갔으니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 더 부자연스럽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에 아직도 꽃잎들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이 쓰디쓴 느낌이 났다. 미안. 사과하는 말 끝이 오므라들었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시선이 어정쩡한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생각보다 훨씬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떡하지. 방향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길을 잃고 맴돌았다. 그냥, 몸이, 좀... 오늘 좀 안 좋네... 꾸며댈 말이 궁색했다. 뭐라고 말해도 믿을지 아닐지 알 수 없었다.
“걱정했잖아. 아프면 말을 해.”
다정한 단어와, 어깨에 둘러오는 팔과, 경계에 있는 사람과... 순간 어쩌면 말해도 괜찮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런데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
웃는 얼굴. 많은 것을 익숙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 지금에도 그 얼굴만큼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심장이 그야말로 내려앉았다. 늪이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
그 후로 나는 도망쳤다. 물론 만남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고 반갑지 못한 인사는 늘 꽃잎을 동반했다. 나를 구성하는 부분을 흘려보내야 하는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더욱 괴로웠다. 이런데도 싫어지지 않아서. 오이카와는 늘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한테서 꽃 냄새가 나. 그건 말이라기보다는 칼에 가까웠다. 너는 꽃을 토해본 적이 없지. 그러니까 알 수 없겠지만. 함께 있으면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해야 꽃을 토하는 일을 견딜 수 있었다.
좁은 학교 안에서 도망칠 곳은 별로 없었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다. 정식 부원 모집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동기가 언질을 준 덕분에 가능했다. 무대에 설 생각은 아니었어서 스탭으로 일했다. 도망이라기에도 부끄러웠지만 교집합이 아닌 사람들과 있으면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었다. 공기가 무거운 일은 없었다. 무대를 구성하고 소품을 준비하는 일은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집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이었다. 사랑할 여지가 있는 것들. 아마 이걸 충분히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꽃을 토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한 줄기의 가능성마저 절실했다. 막이 오르고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연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러다보면 언젠가 다시 오이카와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프지 않고, 피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것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했다. 마치 무언가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홀린듯이 무대를 바라보았다. 환상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막이 오른 후가 배우들의 무대라면 막이 내리고 나서는 스태프들이 분주했다. 오늘 사용된 소품들을 다시 정리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일들이 그렇듯 손이 여러번 갔다. 종막에 쓰였던 책상을 도로 끌어내고 그 자리에 화분을 밀어 넣었다. 미리 준비한 홈에 맞게 끼워넣어야 하는 것이라서 아귀가 맞는 느낌이 나야 하는데 덜걱거리는 소리가 자꾸만 났다. 아무래도 준비한 홈이 망가진 모양이었다.
“이거 홈이 망가졌어요. 바닥에 깔았던 매트 갈아야 할 것 같은데.”
“그거 저기 대기실 안에 있을 거야. 지금 사람 많아서 찾을 수 있나 모르겠네.”
“일단 한 번 가볼게요. 못 찾으면 얘기하고.”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대기실로 보냈기 때문에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많을 거라고는 몰랐지. 밀어닥치는 인파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안에서 몇 번이고 치인 후라서 짜증이 치솟아 있었다. 아 진짜. 푸념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갔다. 머리를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찾았다. 등 뒤에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났다. 자주 경험한 온도가 손목을 감쌌다. 아, 여기까지... 짜증이 피어올랐다. 표정을 도저히 관리할 수 없었다. 인상을 잔뜩 쓰고 뒤를 돌아본 순간 꽃다발이 불쑥 얼굴께로 튀어올랐다. 당황이 분노와 불안을 한꺼번에 가렸다. 짜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건 뭐야.”
“뭐긴. 축하 선물?”
장난스러운 어조가 귀를 뒤덮었다. 듣는 순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피치를 높였다. 아마 억울함과 분노의 중간 어딘가. 아무리 배려를 요하지 않는 관계라도 이건 장난이 과했다. 들고 있는 손을 쳐냈다. 꽃다발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꽃잎이 나풀거리며 바닥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전부 역겨웠다.
“기껏 이러려고 왔어?”
찬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나갔다. 오이카와가 아무렇지 않게 빈 손을 들어올렸다.
“그냥 꽃다발 주러 온 거야.”
그런데 필요 없었네. 오이카와는 웃었다. 저 웃음. 가짜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펑펑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울음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정말 못됐다. 오이카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상처받은 얼굴...
“지금 누가 더 상처받았다고 생각해?”
걸음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대기실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와 까만 복도를 비췄다. 바로 눈 앞에 저렇게 빛나는 곳이 있는데도 나는 저기로는 갈 수 없었다. 오이카와가 입술 끝을 잡아당겨 평평한 모양을 했다. 지금 속상한 건 나야. 오이카와가 말했다.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웃기지 마, 그건 나야. 네가 무슨 상처를 받았든 나보다 클 수 없어. 너는 상처받지 않았잖아. 속을 게워내지 않았잖아... 하지만 말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수면 밑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이카와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다시금 사라지고 싶었다.
공연 잘 봤어.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내가 공연에 나오지 않았다는 건 알지도 못하겠지. 비참했다. 가장 비참한 건 내가 대화하는 내내 혹시라도 꽃이 튀어나올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순간부터 기도가 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텨야 했다. 아마 알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꼭 쥔 주먹이나 떨리는 입술이나 그런 것들로. 그러니까, 나는... 대기실 안은 아직도 시끄러웠다. 텅 빈 복도에서 나는 떨어진 꽃다발을 주워들었다. 대기실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나에게까지는 도저히 닿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이곳을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그건 싸구려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
할 말이 있어. 짧은 대화는 상상 이상의 용기를 필요로 했다. 말을 하자 오이카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닿는 것이 무서워서 눈을 내렸다. 오이카와는 아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상 모르는척을 하는 것은 소용 없었다. 그건 견딜 수 있을 떄의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해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말하자면 필연인 거겠지.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더 이상 꽃을 토하는 것은 아무 상관 없었다. 숨을 참을 필요도 어떻게든 견딜 필요도 없었다. 어젯밤 할 말을 고르고 골랐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뱅뱅 돌아가는 가운데에서 다만 확실한 한가지만이 선명했다. 채 다듬어지지 못한 진실이 아무렇게나 튀어나갔다.
좋아해. 처음에서 태어나 마지막에서 맺는 발화였다.
*
큰 바람이 불었다. 꽃바람이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만큼 크고 고립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스가와라는 천천히, 천천히 손끝부터 꽃으로 화(化)했다. 손과 팔과 어깨를 지나, 종국에는 모든 것이 꽃이었고 사랑이었다. 방금 태어난 분홍빛깔의 꽃잎들이 정신없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둘을 둘러싸고 둥글게 부는 바람이 한바퀴 돌아갈때마다 스가와라는 조금씩 사라져갔다. 대신 꽃잎들이 온 세상에 흩날렸다. 그건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장엄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한 발자국 꼼짝할 수 없이 그 안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모든 곳에서 스가와라가 나부꼈다. 피지 못했던 짝사랑이 최후에 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이었다. 그건 생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었다. 바람은 점점 서서히 잦아들고 꽃비가 나리듯이 하늘거리는 꽃잎들이 하나둘씩 추락했다.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지독한 짝사랑의 끝이었고 한 세계의 마지막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안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모든 것을 안과 밖,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경험했다. 그건 기억될 것이 아니라 매순간 그의 생에 살아있을 무언가였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이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잔잔하게 불었지만 무수히 내려앉은 꽃잎들은 생생한 증거로 남아있었다.
지나가던 동기들이 아니었으면 아마 한참을 서 있었을 거였다. 정신을 채 차리지 못하고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휘청였다. 그런 그를 본 여자 동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벚꽃 피었나 보다. 수북히 쌓였던 꽃잎들은 어느새 따뜻해진 봄바람을 타고 하나 둘씩 흘러갔다. 오이카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처 떨어지지 않은 꽃잎 하나가 하늘거리며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아, 좋아했었나. 늦은 깨달음이었다.
발렌타인 기념~~>.< 사실 되게 로맨틱하다구 생각했음... 왜냐면 마지막 장면이 넘 쓰고 싶었거든 앞부분은 몰라도 저 마지막은 정말 내 안에 오래 있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저거 쓰고 싶어서 아ㅍ부분 써서... 나도 넘 실타 휴 일단 올리는데 낼 수정할 수도... 아 스가는 죽은게 아니고 오이카와의 세계에서 사라진 거ㅅ와 진짜 발렌타인이라기 머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타 양심 다이죠부...아넘웃기네 새벽이라 잘웃을수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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