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크리스탈 캐슬 노래에서어



스가와라는 못 본 사이에 문에 도어락을 달았다. 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번호를 몰라서 초인종을 눌렀다. 시간만큼 초인종 소리가 낡았다. 문 안에서는 순서대로 마루를 밟아오는 소리가 난다. 차분하고 정갈해서 몇 걸음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셀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괜히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걸음의 끝에서 약간 고요한 다음 전자음이 났다. 나는 홱하니 고개를 들었다. 가라앉은 회색 머리카락이 문 틈 새로 팔락인다. 기울어진 자세로 문을 붙들고 섰다. 나는 갑자기 조금 멋쩍어져서 오랜만이야, 하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표정이라기보다 영구적인 흉터같았다. 나는 약간 눈을 찡그리고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면서 최대한 뻔뻔해지려고 애썼다. 더 이상 열쇠따위로는 열 수 없는 철문이 천천히 틈새를 벌렸다. 눈을 내리깔았다. 스가와라는 문을 열어주고 주방에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주방으로 갔다. 뒷모습이 잔가지마냥 말랐다. 얇고. 한참동안 주방에서 달그락대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스가와라는 아주 다급한 일인 것처럼 주방에 서서 뭔가를 분주하게 끓이고 썰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는 대신 서로의 젖혀진 고개나 뒷모습만을 본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상하게 만들까봐 무서워 하는 것처럼. 그렇구나. 4년을 생각한다. 그 동안 지구는 적어도 한 번 허물을 벗었을 것이다. 무엇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가열이 끝난 포트가 전자음을 울렸다.  




*


스가와라는 4년을 묻는 대신 차를 끓였다. 푸르스름한 도자기 잔 안에 담겨서 나왔다. 잔 안에서 거품들이 소용돌이친다. 나는 그 속에 담긴 침묵에서 스가와라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말로 꺼냈을 때 망가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을 것이다. 나는 내심으로 안도했다. 차라리 그쪽이 위태롭지 않으니까. 물론 이제 위태로운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그런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기에는 너무 깨져버렸다. 말하자면 스가와라는 언제든지 나보다 현명한 것이다.


나는 어제도 이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스가와라의 소파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아서 침묵을 마셨다. 쓴 맛이 났다. 스가와라는 사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책을 꺼내고 먼지를 쓸어냈다. 나는 광고 방송처럼 그런 것들을 흘려서 보았다. 무채색의 잔상이 남는다. 눈에 익은 소품들이 찍혔다.


아직도 여기 살고 있네. 


그 말에 한참 움직이던 팔이 뚝하고 멎었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고개가 동선을 그리면서 돌았다. 스가와라는 지워지지 않는 공허가 묻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깨진 눈동자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나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그 전에는 함께 우울하지는 않았다. 우울이 전염병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스가와라는 한참동안 잔뜩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 집을 샀다고 말했다. 


여기를?

그래.


나는 잠깐 그 얼굴을 되짚었다. 스가와라가 원하는만큼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불행한데 불행해지지 못하면 우리는 이제 8년의 공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8년이 되면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서로를 아마 더 미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9년이든 10년이든. 스가와라가 집을 샀다는 사실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까지 유형의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에 대해서.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묘했다. 여기를 찾아올 때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리면 잠자코 맞아줘야지, 하고 다짐도 했었고 물어보면 어쨌든 솔직하게 답해주어야겠다고 각오했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행복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를 내쫓지 않았고 몇가지 말을 해 주었다. 어쩌면 심정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것이 아닐까. 만약 궁금하지 않아서라면. 스가와라는 자신의 안에서 나를 어떤 극단의 위치로 내몰아버렸는지도 몰랐다. 환대에서 폐허를 느끼는 것은 위태로워져버렸기 때문이다. 스가와라가 조금 화를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뜨거운 차를 아무렇게나 마셨다. 차는 따뜻하기보다 뜨거웠어서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금방 잔을 떨어뜨렸다. 삼분의 일 정도 담겨 있던 차가 쏟아지면서 카페트에 얼룩을 남겼다. 둔탁한 충격음. 우리는 순서 없이 차가 스며드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가와라는 카페트가 둥그렇게 젖어드는 것을 잠깐 보다가 잔을 들어서 치웠다. 나는 얼굴을 마르게 쓸었다. 알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고층 아파트의 창문 너머는 탁한 구름이 자욱하다. 차근차근 걸음을 걷는 스가와라를 보았다. 너는?

  



*


나는 소파에 이불을 덮고 누웠다. 스가와라는 매트리스에 정자세로 누웠다. 전에는 한 쪽으로 등을 구부리고 잤다. 나는 이게 무엇의 흔적인지 모른다. 밤은 변했다.


쉽게 잘 수 없었다. 심야에 바스락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몸을 이리저리로 뒤척였다. 창문 바깥은 하늘이 검다. 밤에도 구름이 끼었다. 무언가를 감출 수 있을 것 같이 마음껏 뿌옇고 탁했다. 새까만 구름이 눈동자를 타고 들어와서 뇌를 잔뜩 흔들었다. 과거의 모습들. 화내는 방식. 무언가를 숨길 때 짓는 표정. 엿보는 기분이 들어서 급하게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시간이 나를 마구 찔렀다.       


4년을 가졌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4년 전에는 사귀었다. 지금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사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것들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마저 변한다는 것은 잔인하다. 변한 4년이 있었다면 연애했을까. 이 집에는 짝이 갖춰진 여분의 식기나 혼자 쓰기에는 큰 매트리스 같은 것들이 있다. 나는 그걸 발견했을 때 순식간에 기대했고 닫힌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 방황했다. 여기에 끝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나는 지금 헛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헛된 것들. 박제된 시간들. 미완결의 후회.


소리를 내서 스가와라를 불렀다. 얇은 목이 천천히 돌아온다. 배꼽 위에 가지런히 포갰던 손이 천천히 이불을 가르고 올라와서 눈을 문질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내일 영화라도 보러 가자.


조명 대신 달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픽하고 삐져나오는 숨소리가 났다. 탁, 하고 터지는 파열음이다. 나는 이불을 손 안에서 마구 구겼다. 버석한 숨이 죽는 소리.


그래.


우리는 다시 고요하다. 손톱 끝에 매달린 밤은 이불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잠깐 숨을 쉴 수 없었다. 속이 뿌옇다. 사실은 자신이 없다.




*


일어났을 때는 안개가 잔뜩 끼었다. 고층의 삶이란 안개인 걸까. 나는 이불을 개어서 소파 한 구석에 밀어두었다. 개인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스가와라를 부를까 말까 한참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우리는 어쨌든 다시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어제도 여기 있었던 사람같이 평범한 인사를 하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안개가 끼었으니까.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개인실 안에서 비닐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났다. 그림자가 문 틈으로 졌다가 지워졌다가 했다. 어룽진 자국들이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가 도로 돌아온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개어진 이불을 마구 팔로 뭉개면서 기댔다. 방 안에서 창백한 공기가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벌컥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열린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펄럭거리면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쾅, 하고, 현실은, 변했다고, 알려주는, 울림, 나는 어젯밤에 막았던 숨을 쉬었다. 속을 채웠던 것이 깊이에서부터 빠져나갔다. 텅 비어서 갑자기 조금 익숙해졌다. 이마를 쓸었다. 망설이게 되었다. 나는 어제의 단어를 곰곰히 생각했다. 그 공허했던 말들. 


문 밖에서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개인실을 빠져나왔다. 스가와라가 슈퍼 이름이 써 있는 갈색 종이 봉투를 안고 들어왔다. 신발을 가지런하게 벗어놓았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불이 켜져있길래. 탁한 목소리가 성기게 빠져나왔다. 스가와라는 봉투를 식탁 위에 세워서 올려놓은 다음 내 옆을 지나서 불을 껐다. 차가운 바람이 묻었다. 끝 부분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이 난다. 나는 몸서리쳤다. 


됐지?


간단한 일이었다. 나는 멍청이처럼 더듬댔다. 스가와라가 옳다. 


영화 보러 간다면서.


아, 그래, 맞아, 허둥지둥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나를 조금 이상한 눈길로 보았다. 눈 끝이 얕게 찌그러졌다. 나는 애매하게 웃는 소리를 냈다. 가서 씻기나 해. 팩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어제보다 닫힌 건지 열린 건지 모르겠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



시간을 잘못 맞춰서 오는 바람에 앉아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 그게 가장 빨리 시작하는 영화였다.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는 콜라 한 잔을 놓고 얼음을 씹어먹으면서 시간을 죽였다. 집어온 영화 팜플렛을 빈 의자에 뒤집어놓고 영화 소개를 읽었다. 정반대의 중력. 자신이 속한 세상을 벗어날 수 없는 연인. 나는 팜플렛을 도로 뒤집었다. 남자와 여자가 포스터 양 편에서 서로 손을 뻗고 있는 사진이 전면에 박혔다. 손으로 덮어서 가리자 스가와라가 손바닥과 의자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서 팜플렛을 빼갔다. 손바닥을 움츠렸다. 나는 긴장하면서 스가와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괜찮네. 건조한 목소리가 파스스 떨어진다. 나는 내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스가와라가 손바닥을 흘긋 넘겨다보았다. 나는 그 하얀 얼굴과 내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그냥, 하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면서 영화관의 회색 벽에 등을 기댔다. 나는 부우하고 입술을 밀었다. 


갑자기 여기가 이렇게 뒤집히면 좋겠어.

이 영화처럼?

재밌을 것 같잖아.

아침에 일어났는데 천장에서 떨어지면 어떡해.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눈물점이 마구 흔들렸다. 나는 따라서 웃었다. 


그래도 영화 해피엔딩이겠지.

글쎄.


스가와라가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렸다. 끝이 구겨진다. 나는 아마, 하고 대답을 정정했다. 입술이 그제야 위로 둥글게 휘었다. 정반대의 중력. 스가와라가 홍보 문구를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었다. 그런 다음 얼음을 아그작거리면서 씹었다.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스가와라가 텅 빈 컵을 달달 흔들었다. 시간 됐다. 나는 어어, 하면서 웃었다. 쓰레기통에 빈 컵과 영화 팜플렛을 둘 다 집어넣었다. 어쨌든 영화가 해피엔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스가와라는 영화 이야기만 했다. 영화가 재밌었고 여자 주인공이 어떻고, 그런 얘기. 나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우리가 하루 종일 그런 이야기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오늘에 대한 이야기들. 나는 어정쩡하게 대답하고 의미없이 웃었다. 스가와라는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는 표정을 하면서 어쨌든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집에 간신히 도착했을 때 스가와라는 조금 지친듯이 어깨를 늘어뜨렸고 그런 다음 재밌었네,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다음 개인실 안으로 쏙하고 들어갔다. 나는 바닥에 앉아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우리는 4년 전에도 알았고 5년 전에도 알았는데 이제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지쳤다. 아마 스가와라도 그럴 것이다. 


이렇게 과거가 없었다는듯이 굴 거라면 왜 스가와라를 찾아왔을까.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거라면 나는 스가와라를 괴롭히지 않는 편이 좋다. 스가와라가 보낸 4년을 모르니까. 허벅지에서 가시가 마구 돋았다. 다리를 세웠다. 개인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애가 우는 방식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일주일 동안 스가와라의 집에 있었다. 규칙적으로 대화하고 식사를 함께 한다. 일과같이 그렇게 했다.  의무적으로 대화하는 것과 침묵 중에 무엇이 더 나쁠까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일절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매일 매일 그날의 이야기를 했다. 뉴스에서 본 이야기. 오늘 아르바이트 장소에 왔던 손님 이야기. 언제까지 현재만을 살 수 있을까 가늠하면서 이야기들을 들었다. 언젠가 이 일들을 과거라고 읽을 수 있게 되면 슬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녁에는 늘 함께 있었다. 거실에서 라디오를 듣는 것이 일이었다. 나는 그 지지직거리는 소음을 주의해서 들었다. 우리가 보았던 영화 평이 나왔다. 나는 소파 아래에 앉아 있다가 스가와라를 올려다보았다. 스가와라는 라디오를 듣고 있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무릎을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너는 나쁜 자식이야, 스가와라가 갑자기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멍하게 보았다. 


나를 때려서 다리를 부러뜨린 다음에 내 지갑을 챙겨서 도망쳤잖아.

안 그랬어.

그럴 수 있다는 거 알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을 하는 스가와라는 손목을 뒤틀면서 입술을 마구 깨물고 있었다. 자해하는 것처럼 아주 고통스러워 보였다. 얼굴이 금방 젖었다. 네가 너무 좋아.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들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것처럼 억지로 억지로 다 뱉어내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애를 끌어당겨서 안았다. 마른 팔이 금방 끌려왔다. 팔로 어깨를 감싸고 등을 두드렸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 끝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뺨 위로 떨어졌다. 눈물점이 어룽댄다. 


아주 나쁘게 떠날 거지.

아니야.

너를 보고 있는데 네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럴 거지. 스가와라는 확신하듯이 말했다. 나는 금방 우울해졌다. 손가락 하나 하나를 세워서 스가와라의 등을 쓸었다. 튀어나온 뼈가 손가락 끝에 걸린다. 변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안다. 우리를 낫지 못하게 만드는 상처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 아주 희미한 붉은 경계를 하나 갖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너를 괴롭히고 있어. 나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반대 편의 손목을 세워서 그 애의 뺨을 닦았다. 눈물이 마구 번진다. 사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말 안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입술이 웅얼거리면서 움직였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으면 아직 그래도 돼. 나는 한참 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잔뜩 축축한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사랑해. 어떻게든 간절한 척 하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런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웃었다. 눈이 마구 풀려서 접혔다. 눈동자 사이의 금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거짓말.


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다정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스가와라는 아슬아슬하게 윤곽을 유지하고 있는 눈으로 나를 훑었다. 위태로워서 슬펐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애를 마구 껴안았다. 스가와라가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같이 흔들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제발 그냥 가. 나는 팔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제발. 스가와라는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스가와라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다. 스가와라는 한참 동안 몸을 심하게 흔들다가 지쳐서 가만해졌다. 나는 그 애의 굽은 어깨를 보았다. 제발 이제 그만 보게 해줘. 다 긁힌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팔을 풀었다. 스가와라가 힘없이 무너지면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게 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대체 뭘 얼마나 망가뜨리면서 살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너무 끔찍했다. 그럴게, 간신히 대답했다. 자음들이 입 안을 마구 찌르면서 나갔다. 둘 다 힘없이 웃었다. 최악이었다.




새벽에 막힌 한숨 소리를 들었다. 끝이 잘린 얕은 신음이 화장실 안에서 타일을 마구 울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긴 물 소리가 났다. 화장실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문고리가 고장났을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닫힌 공기가 빠져나오면서 비린내가 확하고 올랐다. 타일 위로 점점이 박힌 붉은 자국 끝에 스가와라가 있었다. 감긴 눈과 사방으로 마구 튄 핏자국과 하얗게 질려서 늘어진 너와.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스가와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급하게 그 애를 당겨서 욕조 안에서 끌어냈다. 잔뜩 늘어진 스가와라가 핏자국이 없는 반대편 팔을 들어서 내 눈 끝을 닦았다. 그제서야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겠다고 했잖아.


스가와라는 띄엄띄엄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그 애에게 기댔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지 마 제발. 목소리 끝이 흔들린다. 타일이 흔들리는 목소리들을 반사해냈다. 


갈테니까 제발.


손목을 세웠다.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 손목 위에 포갰다. 거칠한 상처가 매끈한 피부를 긁었다. 스가와라가 천천히 입술 끝을 끌어당겼다. 좋아해, 새빨간 입술이 그렇게 말했다. 나도. 이번에는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는다. 전부 너야. 스가와라는 행복해보인다. 망가진 이름 두개가 나란하다. 






아무글자 마스터가 되어가고 있다 내 스가 왜 이러케 예민해졌지 중간에 나오는 영화는 이름이 업사이드 다운인데 안 봐서 모루는... 긴 영상 보기 넘 힘들다 근데 집 너무 한국 집이고 영화관 너무 우리 동네 cgv야 튜유ㅠ유 근데 나 이거 막... 너무 그렇다... 아무글자 집대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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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해리포터 au인건 무슨 목적이 있냐고요 근데 슬리데린 버릴 수 없었음이네...ㅠ0ㅠ0ㅠ0ㅠ뭔가 음 이런걸 번데기라고 부르는건가 하는 기분이 든다 그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스탠이 운전하는 구조버스 그것인데 쫌 너무 기숙사 이름 나오는 아무 마법사세계 얘기인것같은... 그래 호그와트가 뭐 도쿄에 분캠낼수도 있지...  




오후는 느리고 무거웠다. 둘 다 할 일이 없어서 가만히 누워있었다. 쿠로오가 가끔씩 선수들의 모형을 날아다니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스가와라는 베개에 볼을 뭉개면서 모형들이 옆 침대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마법을 쓸 수 있었던 때가 기억이 안 나.


우울한 목소리가 뭉그러져서 기어나왔다. 스가와라의 창문 밖에는 비가 내렸다. 한 달 내내. 쿠로오는 대답하는 대신 스가와라의 침대 옆에 놓인 쿠키 바구니를 끌어다가 밀가루만 열심히 씹었다. 사이에 박힌 초코칩이 으스러지는 단단한 소리가 났다. 추임새인지 잡음인지 모를 음음, 하는 소리가 섞였다. 스가와라는 소리나게 한숨을 푹푹 쉬었다. 기대도 안 했다는듯이 말이 이어졌다.


뭔가 그때는 행복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기억이 안 나서 상상하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때가 재밌었다고 상상하는 거지. 스가와라가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천장에 붙은 벽지에 그려진 별자리들이 뛰어다녔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말이 뚝 끊겼다. 쿠로오가 목에 쿠키라도 걸렸는지 켁켁대면서 기침을 뱉었다. 스가와라가 이불 안에서 미지근하게 식은 물병을 던졌다. 눈이 세모로 서서 물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쿠로오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얼굴이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그게 무슨 얘기냐면 너랑 있는 건 엄청 재미없다는 얘기야.


나 잔다. 스가와라가 돌아누웠다. 이불이 버석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자장가 불러줄까? 쿠로오의 목소리가 귓등을 타고 넘어갔다. 스가와라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뻗어서 가림막을 쳤다. 마감이 잘 된 차르르하는 소리가 났다. 벌써 한 달이었다.




*


스가와라 코우시가 구조 버스에 탑승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다. 스가와라는 한 달 전의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갑자기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그렇게 느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야말로 마법같이. 의심하면서 지팡이를 들었을 때 스가와라는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는 언제나 마법사였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아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도망쳤다. 날씨가 좋은 밤에 캐리어를 끌면서 기숙사에서 걸어나왔다. 결계 밖으로 나왔을 때 스가와라의 앞에 구조 버스가 멈춰섰다. 차장은 스가와라에게 갈 곳이 있냐고 물었고 스가와라는 방금 잃어버린 참이었다. 오래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스가와라는 이 버스를 타고 떠돌게 된 것이다. 



쿠로오는 스가와라의 맞은편 침대를 썼다. 망토를 보고 서로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쿠로오의 침대 머리에는 초록색 망토가 걸려있었다. 스가와라는 속으로 진저리쳤다. 슬리데린. 어쨌든 둘은 침대에 앉아서 서로 여러가지를 질문했다. 쿠로오는 이 버스에 학생이 타는 것은 드문 경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웃었다. 스가와라는 호그와트를 5년 다녔지만 환하게 웃는 슬리데린 학생은 그때 처음 보았다.


쿠로오는 이 버스를 탄지 두 달이 지났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었냐고 묻자 쿠로오는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전혀 조급하지 않은 어조로 이 버스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하지만 쿠로오도 이 버스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둘 모두 바깥에서 왔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그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추측했다.


스가와라가 구조 버스에서 느낀 가장 큰 특징은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버스는 누군가가 머물렀던 얼룩이나 냄새가 없이 하얗고 깨끗한, 무색 무취의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머무르고 흔적을 남기는 공간이 아니다. 떠나기 위한 사람들의 공간이구나. 스가와라는 그 하얀 침대에 누워서 쿠로오의 침대 옆에 달린 창문을 보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부는지 나무로 된 창틀이 덜걱거렸다. 그때 스가와라는 곧 도착한 참이었기 때문에 스가와라의 창문 밖으로는 도쿄의 야경만 빛나고 있었다. 제 창문 너머를 보고 있는 스가와라를 보고 쿠로오는 혀를 가볍게 찼다.


너도 안개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가라앉은 목소리였고 스가와라는 그게 굉장히 피곤한 목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쿠로오는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앉아있었다. 눈이 가느스름했다. 스가와라는 그 안에서 뱀을 보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하고 대답했다. 쿠로오는 눈을 찌그러뜨리면서 웃었다. 스가와라는 웃기지도 않은데 왜 웃냐고 말하려다가 초록색 망토를 생각하면서 그만두었다.




*


버스 안은 끝도 없이 늘어선 침대들의 행렬이었다. 대체 이 버스는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는 걸까 스가와라는 가끔 생각했다. 버스는 늘 일본 어딘가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누군가를 태웠다. 길을 잃은 마법사라면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버스에 있으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침대를 지나쳐가서 아무 흔적도 없이 새 것 같은 침대에 자리잡는 것을 몇 번이고 보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리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애초에 여기에 내리는 문이 있었나? 하차에 관한 스가와라의 질문에 쿠로오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어떻게 내리냐고 묻는 거야?

그래.


쿠로오는 활짝 웃었다. 눈이 가로로 가느다랗게 말려들었다. 스가와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점술은 꽝이겠다.

뭐?

마음의 눈을 좀 떠 봐.

 

스가와라가 얼굴을 찡그렸다. 쿠로오는 아주 재밌다는듯이 입 꼬리를 당겼다. 


대체 무슨 소리야?

왜 그런 거 있잖아. 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그래야 진짜 마법사지.


너는 내리려면 한참 걸리겠다, 하면서 쿠로오가 빙글빙글 웃었다. 스가와라는 제대로 된 대답을 포기했다. 쿠로오는 여전히 둥글게 휘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내리는 사람을 본 적은 있어?

마음의 눈으로는 뭐든 볼 수 있지.


쿠로오는 늘어서 있는 침대들을 대충 훑으면서 대답했다. 무성의한 대답에 스가와라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본 적 없네.

네가 몰라서 그래.

대체 뭘!


쿠로오가 손가락을 세워서 흔들었다. 스가와라는 꽉 막힌 목을 가지고서 맞섰다. 버스에 타고 나서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대화는 또 처음이다. 쿠로오는 도저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스가와라가 손을 내저었다. 잊어 버려. 쿠로오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스가와라는 도로 제 침대에 주저앉았다. 매트리스가 퍼석하게 가라앉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동전 몇 개가 철제 난간에 부딪히면서 쇳소리를 냈다.


야.


스가와라가 천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궁수자리를 보면서 말했다. 쿠로오는 무릎밖에 보이지 않는 건너편의 침대를 보면서 왜,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이 버스에 두 번 타는 사람도 있을까?


길을 잃고 싶어서 잃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그러면 돌아올 수 있을까.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느리게 흘러나왔다. 쿠로오는 그제서야 완전히 소리내어 웃었다. 스가와라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너 퀴디치 해본 적 있어?

아니.

그럼 잘 들어.


퀴디치는 스니치를 잡으면 끝나는 경기란 말이야. 스니치를 잡으면 한 번에 150점을 얻는다고. 그런데 스니치를 잡는다고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니야. 그 전에 200점씩 뒤쳐지고 있었으면 스니치를 잡아봤자 그 경기는 꽝인 거고. 그러니까 수색꾼은 때를 잘 노려서 스니치를 잡아야 돼. 안 그러면 열심히 해놓고도 지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아니, 스가와라가 입술을 깨물면서 대답했다. 쿠로오는 웃음기를 지우면서 아주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한 경기에서 150점을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밖에 없는 거야. 그게 규칙이야. 경기에서 지더라도 한 번 기회를 쓰면 끝이야. 끝이라고. 


이제 알겠지? 입꼬리가 도로 말려 올라갔다. 쿠로오가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평소처럼 선수들의 모형이 침대 주위를 빙빙 돌았다. 스가와라는 잠자코 들었다. 쿠로오가 이 버스에 오른 이유가 뭘까 처음으로 궁금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스가와라는 쿠로오의 침대에서부터 넘어오는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여성 앵커가 빠르게 속보를 전했다.


‘… 이번의 연쇄 살인으로 집계된 피해자는 총 20명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범인은 각 피해자들로부터 피를 소량 적출한 것으로 보이며, 범행 날짜는 패턴대로 달이 뜬 밤인 것으로 밝혀져…’


스가와라가 인상을 찡그렸다. 쿠로오는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완전 마법사잖아.

맞아.

죽은 사람들도 다 마법사겠네.

그것도 맞아.


스가와라가 소름돋는다는 표정을 했다. 쿠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턱이 들려서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학교는 안전할까, 스가와라가 중얼거렸다. 침대 밑의 그늘에서 아마, 하는 대답이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보안 카메라가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라디오의 광고 멘트가 요란하게 뒤를 이었다. 스가와라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대체 이런 일은 왜 생기는 거야.


대답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된다, 굳이 죽여야 하나, 틀림없이 사회부적응자일 것이다, ... 한참 이어지던 도중에 쿠로오가 버스 통로로 나와 침대 난간에 걸터앉았다. 이불청이 바스락거렸다. 동의를 구하려던 스가와라는 말을 뚝 멈췄다. 눈 안에 뱀이 있다. 


그렇게 무서워? 


스가와라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쿠로오가 낮게 숨쉬는 소리가 통로를 건너서 들렸다. 가쁜 소리였다. 쿠로오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었다고.

그게 그렇게 무서울 일이야?


스가와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뱀이 쉿쉿,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었다. 스르륵 사라지는 꼬리의 끝이 눈동자 위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아닌 것 같아. 쿠로오가 반쯤 닫힌 눈을 느리게 열었다. 그러면 왜?


나는 네가 제일 무서워.


하, 하, 하, 쿠로오가 찬바람 나게 웃었다. 소리가 느리게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쿠로오가 눈을 세로로 세웠다. 송곳니같은 시선이다. 웃지 않는 눈 밑으로 입술이 길게 찢어졌다.


그거 잘됐네.


쿠로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스가와라는 쿠로오를 잠깐 보다가 돌아누웠다. 가림막을 내리지 않은 것은 자존심이다. 건너편의 침대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끼리 부딪혀서 쓸리는 사박이는 소리만 났다. 스가와라는 한 달 내내 우기였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 밖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비가 내려도 아무것도 젖지 않는다. 오로지 비가 내리고 있을 따름인 곳이다. 물기가 필요한 곳들이 많아서 아까웠다. 




*


스가와라가 눈을 찡그리면서 하, 하고 텅 빈 한숨을 쉬었다. 쿠로오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스가와라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하얀 침대였다. 다시 이곳을 거쳐갈 누군가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침대맡에 달린 초록색 망토나 창 밖으로 볼 수 있던 안개는 사라졌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다시 도쿄 어딘가의 네온이 반짝였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처음 사라졌을 때처럼 난데없는 생각이었다. 스가와라는 조금 의심하면서 베개 밑에 두었던 지팡이를 꺼내서 흔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침대 천장 안으로 불꽃이 빨려들어가면서 불꽃놀이 마냥 펑펑 터졌다. 처녀자리가 폭발하는 자리로부터 힘겹게 도망쳤다. 허탈한 웃음 위로 불똥이 화려하게 부서졌다. 


돌아갈 때구나, 하고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침대 옆에 붙어있는 초록색 EXIT 표시등을 보았다. 어둠에 잠긴 버스 통로에서 혼자 빛을 내고 있었다. 이곳으로 나가면 된다고 당연하다는듯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리는 사람을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쿠로오는 대체 이 표시등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 애가 애초에 이 버스에 탈 필요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언제나 쿠로오는 여유로웠다. 처음부터 길을 잃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스가와라는 자꾸 점멸하는 시야를 붙잡았다. EXIT! 출구가 빛난다. 천천히 걸음을 딛었다.




*


스가와라가 돌아왔을 때 이미 교정은 시끄러웠다. 초록색 물결이 굽이치고 있었다. 슬리데린의 적자(嫡子)가 돌아왔다! 구호같은 말이 학교를 파도처럼 휩쓸었다. 시계탑 위에 걸린 초록색 망토가 개선장군처럼 펄럭였다.


쿠로오 테츠로, 신음처럼 이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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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기를 쓰고 싶어서 조각글도 올렸네... 왜냐하면 그냥 일기쓰면 뭔가 내 마음이 편치 않아 나 항상 너무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한다 별로 남들은 관심도 없엌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 아는데 뭔가 그냥 그런 마음이다 힝


2. 사족쓰는 거 넘 조아서 조각 사족 여기다가 쓸 건데 1은 스가와라가 자폐인 척하는 것이고 2는 지구 종말D-?? 정도인 3은 발레하는 스가~~인 그런 이야기지만 농담이 아니라 셋 다 삼월 조각이므로 아마 그때의 텐션은 다 까먹은 것이 아닌가요 그치만 뭔가 나 저 조각들 다 좋아했고 뒤를 항상 쓰고 싶었다 근데 뒤가 조각의 퀄보다 떨어진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기 ㄸ ㅑ문에ㅠㅠ 그래 뭐 나만 좋으면 됐지 뭐... 사실 너무 막돼먹은 생각인데 나중에 막 뒤만 커미션으로 넣고 싶다... 근데 근본적으로 내가 다음 내용 자체를 생각 안 했지


3. 요새 앙스타를 접었기 때문에 몬가... 하트 계정 가끔 가서 구경하게 되는... 그런... 앙스타 접은 이유 너무 한심하다 왜냐하면 1주년 가챠를 망했다네 정말 노관심인 캐가 나왔고 그래서 갑자기 막 아 이게임 왜해 이런 느낌 들고 막 아무튼 막 너무 화나고 억울하고 슬펐음 왜 나한테 얘를 주지 이런 느낌... 나는 조아하지 않는데 걔가 총선거 순위가 높았던 애라서 더 너무 싫었고 막 화나고 분노조절장애 걸려서 막 흐ㄱ흑 야 내가 이즈미 얼마나 조아했다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막 얘 안 나와서ㅠㅠㅠㅠ 남들은 의즈미 이러면서 막 스탯 별루라구 그러던데 나는 그 카드가 넘 갖고 싶었으며... 그래서 세달간 백만원을 속성으로 붓고 나서 게임을 접었다는 슬픈... 그런 사연... 그래서 요새 슈스엠 하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는 답이 없는 애다 그냥 답 없음


4. 요새 슈스엠도 하고 워커도 하고 근데 되게 둘 다 대충 대충 하고 있다... 애초에 워커는 별로 게임도 아니고 슈스엠은 탭하는 소리 시끄러워서 몰래 하기가 힘들며 헤드폰 수 제한이 있따 근데 오랜만에 들어가니까 막 레드벨벳에 예리 추가돼서 내 스탯 망함 레드벨벳 주력 그룹이었는데 예리가 테마카드가 없어서 망하뮤ㅠㅠㅠㅠㅠ 그래서 태민... 태티서... 헨리... 이런 세장짜리 덱들ㅋㅋㅋㅋ열심히 키우고 이따 구오빠 엑쏘 열심히 키운다... 엑쏘 조아함 잘생겼으니까


5. 최근에 본 것 스콜피온과 멘탈리스트이다 사이먼베이커 저세상 스윗함임 진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웃을 수 있지 생각하면서 여자들이 어딜 가나 제인한테 작업거는 거 너무 이해가고 막 진짜 그냥 너무 잘생기고 막 웃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 근데 너무 막말함... 진짜 문제 있는데 얼굴이 그 문제 없애주는... 그리고 리스본 넘 예뻐~~~~! 아직도 생각하는게 테레사 넘 쎄섴ㅋㅋㅋㅋㅋㅋㅋ막 뭐였지 제인이 리스본보고 퍼즐 맞춰서 선물타가라구 퍼즐상자 책상위에 올려놨는데 리스본이 망치로 깨버림ㅋㅋㅋㅋㅋㅋ아니 어떻게 이럴수갘ㅋㅋㅋㅋㅋㅋ제인이 막 너 책상에 망치 왜 있냐고 그러는데 진짜 그래서 더 웃겼다 아니 망치 왜 가지고 있으시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악! 진짜 사이먼 베이커... 너무... 너무 좋네... 컴퓨터에 사진도 있다

솔직히 나는 사이먼 베이커라면 그냥 다 좋을거같아... 그냥... 아 미쳤나봐 어떻게 저렇게 스윗하게 웃지 아아아아ㅏ아ㅏㄱ 진짜 너무 젠틀스윗하며 나를 죽이려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냥 나를!!!!!죽이려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어어어ㅓ엉ㅇ아글구 여기 킴이랑 썸머가 나오는데 둘이 연애하는 거 넘 슬프고 좋았따 막 킴이 썸머 자르는데... 썸머가 나는 이 일 필요하다구 인정해 니가 나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잖아 인정하라고 이러면서 화내고... 근데 썸머가 킴 조아해서 자르는 거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서 킴이 머라 그랫더라 니 인생이 불행한거를 막 자기로 가리려고 하지 말라구 니 인생이 망한거라구 약간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그리고 나서 둘이 막 엄청 연애하고... 썸머 건든 애 킴이 다 때려주고...ㅠㅠㅠㅠㅠ진짜 킴 되게 무뚝뚝하고 이런 캐릭인데 정말 넘 남자이기 때문에... 나중에 썸머 결혼하는 것도 도와주고 이거 진짜 내 맘 너무 아팠다 막 검사가 와가지고 킴한테 너 이 일로 니네 팀 다 불이익 있을거라구 협박하는데 썸머를 위해서...ㅠ0ㅠ 그럴 여자 아니라고 완전 단호하게 말하는데 그 여자는 일단 창녀였고 경찰이랑 연애하면서도 코카인 터는 그런 애였는데... 너무 사랑해서... 그런 여자 아니라고ㅠ0ㅠ0ㅠ0ㅠ 팀강 진짜 머싯다구 생각했음 진짜 한국계라서 한국말도 잘하구... 아 글구 썸머가 해변달빛 기차 타구 떠나는데 이름 넘 예뻐서 슬펐다 해변달빛이라니 이걸로 나중에 머 쓰고 싶다구 생각했음 되게 싸구려 술집 이름같지 약간 우리의 해변달빛~ 이런 느낌의 단어이다 막 가게 조폭들이 와서 스가 찾으려고 다 부수고 그래서 스가가 나중에 미안해 뭐 이러는 거... 괜찮아 우리는 다음 해변달빛을 타러 갈 거야 이러면서 위로해주구...ㅋㅋㅋㅋㅋㅋ 나 정말 답 업는 후죠시이네 어떡하지 암튼 해변달빛 넘 아름답다구 생각했음 아무튼 멘탈리스트 너무 조은 드라마이다 지금 열심히 보고있음ㅠㅠㅠㅠ0ㅠ0ㅠㅠ0ㅠ0ㅠ 약간 방송사랑 사정땜에 그대로 종영나버린거가튼데 넘 안타깝다 애냐하면 사이먼 베이커 필모가요 네... 그러하네... 슬픔... 오로지 멘탈리스트가 히트했을 뿐 그는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 따위의 조연이었다고요 거기서도 여자 꼬셨다고ㅋㅋㅋㅋㅋㅋ물론 슈퍼스타긴 하지만~~~~ 아무튼 웃는거 넘 좋고 빨리 담 작품 찍으셨음 좋겠따 이런 미남 썩히면 정말 천치 머저리라구 할리우드 영화를 찍어라 아 움짤 볼때마다 막 내 맘이 397489138번 정도 두근두근 

스콜피온 얘기는 짧게... 걍...그다지...재밌지 않았는데...왜냐면 별로 얘네가 굳이 천재여야 하냐고 이런 생각 들었기 때문에... 천재 아니고 그런 비슷한 문제 해결하는 미드 이미 8301231개 있었기 땜에 별 생각이 안 들었다 대신 남자 주인공이 쫌 잘생겼다고 생각했고 뭐 실화라니까... 나에게는 NOT PERSONALLY 드립만 남았다 이게 모냐면

A: 이 호박머리까마귀(머 하여튼 희한한 새)가 살아가려면 283에이커가 필요하고 그 부지가 있는 곳은 00시야

경감: 오

B: 넌 틀렸어 그 새는 223 에이커만으로도 살 수 있다구 그러면 ㅁㅁ도 후보가 될 수 있어!

경감: 자네도 그 새를 알아...?

B: NOT PERSONALLY 

이런 얘긴데 이거 왜 쓰고 있지 볼때 진짜 나 완전 째면서 웃었는데 써놓으니까 걍 그러네 너무... 머랄가... 미드 특유의 위트... 그러네... 볼땐 재밌었다 드라마말고 저 드립이 그거랑 대추야자의 학명이 데이트라고 하네욘 그래서 천재들끼리 막 데이트 디저트는 대추야자~이러면서 지들끼리 웃는데 나는 정말 쟤네 미쳤나보네... 이런 느낌이 되었던


6. 아 멘탈리스트 얘기 넘 흥분해서 길게 했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정말 사이먼 베이커 잘생김이다


7. 유튜브에서 크리스탈 캐슬이라는 가수를 찾았는데 완전 조음 BAPTISM이랑 PLAGUE 이러케 두곡 진짜 최애이고 넘 조음 디스이즈 유어!!! 밥티즘!!! 근데 알고보니까 해체했다구 함 여성 보컬이 색깔을 냈는데 그 보컬이 솔로로 독립한듯... 암튼 노래 너무 조아서 계속 듣는다 듣고있음 이곡 저곡 다 좋음 진짜 휴휴휴휴


8. 글 얘기 쪼끔만 하구 싶음이다 왜냐하면 나 항상 이런 저런 생각하는데 (당연히) 말할 곳이 없으므로... 나 트친도 생겼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낯 가림이다 약간 원래 이렇게 내가 낯가렸나 생각했는데... 근데 왜냐면 나 고등학생 이후로 랜선으로 친구사귄적없단마럌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잉잉 다들 어떻게 친구 사귀지 나 고등학생때 어케했는지 다 까먹음 이후로는 일단 선 얼굴틈>후 트친 루트를 탔기 땜에... 행사뛰다 보니까 그러하였다... 그래서 막 다들 친한 거 보면 막 나는 거리를 조절할 수 없으며 손을 떠는 병이 생김(과장!임!) 아 근데 트위터 괄호 반만 치더라구... 이거 대체 뭔 문화임 이런 거다 저 정말 00님이 조아요ㅠㅠ(00님:? 그래서어쩌구저쩌구 이런건데 나 왜 괄호 다 안 치는지 넘 궁금함 이거 신 트위터 문화인가????????? 나 너무 할머니같아 대체 모야 울 엄마냐고 울 엄마 맨날 내가 모 얘기해주면 어머 요새 애들 정말 재밌네 그러는데... 그 느낌이라구... 그래서 뭔가 슬프다 내 친구들은 저러케 말하는거 못봤서ㅠㅠㅠㅠㅠㅠㅠㅠ나 어린데 어릴걸 아마 어리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아직 스물 다섯살 안 됐는걸... 나의 어림 강력 어필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아 모지 나 글쓰는거 얘기할랴고 햇는데


9. 그렇다 머 얘기하랴고 했냐면 사실 트친이 업을대는... 되게... 아무거나 써서 올릴수 있었네 왜냐면 나만 읽으니까... 아무 부담 없고요 걍 음 망했네~ 하면서 되게 산뜻하게 올렸는데 나 너무 자의식 과잉이라서 자꾸 누가 읽을거라는 착각하게 되어버림 계정 별로 가지도 않는 주제에 나 졸라 못됐음이다 그래 써놓으니까 그러네... 근데 막 암튼 잘쓰고 싶어짐 근데 나 너무 막 그런거 있음 아무 생각 없어서 쓰고 있으면 걍 음~~하면서 손가는대로 막 쓰고요 그 담에 망했네... 하고 덮는 이 루트가 막 반복중이다 이 블로그에 비밀글 몇개 있는지 다들 모르지~~~~ 궁금한 사람~~~~~? (X)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새벽이라서 미챠가나봐... 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아침에 씻을 때마다 이 귀찮을 짓을 살면서 천번도 더 해야하다니 정말 그만 살고 싶다 이런 생각함 암튼 쫌 잘쓰고 싶다 근데 어케 잘쓰지, , , 항상 나 너무 촌스러움 감출수없어서 괴롭다... 사실 나 너무 내 인생 전체가 촌스러움으로 막 이러케 붙어있는 기분이다 걍 뭐라해지 멀 해도 좀 그런 기운을 지울 수 없음ㅋㅋㅋㅋㅋㅋ아무리 내가 간지 때까리를 내고 싶어도 촌스러움 지울 수 없어서 인생 괴로움이다 


10. 왜 이러케 자꾸 딴길로 새지? 암튼 요새 막 그런 생각함...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하면서 살까... 나 너무 아무 생각 없어서... 그 사람들도 걍 아무 생각 없이 쓰는데 잘 써지는 걸가,,, 나 사실 막 그런거 넘 신기함 저는 글쓸때 복선 까는 타입이라서요~ 이런거 왜냐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미리할수잇는지 넘 신기함 암튼 그러네... 갑자기 너무 졸리다... 잘자요 안녕


11. 아 딱 하나만 멘탈리스트에서(ㅋㅋㅋㅋㅋ 막 제인이 자기 구 정신과 의사랑 작별키스하는데 리스본이 우~~JANE KISSED A GIRL~~하면서 놀리는데 진짜 둘이 넘 조아보였음 저 말투 5년동안 내 머릿속에 있었다 잊혀지지 않음 JANE KISSED A GIRL~~~ 하... 로빈튜니 너무 그여자 닮음... 제시제이랑 다크호스 부른... 케이티 페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설명봐라 암튼 로빈튜니 케이티 페리 닮았고 제인 키스드 어 걸 이라고 말하는 드라마 멘탈리스트 완전...좋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2. 이거 흑역사되면 어떡하지... 저번 일기에는 뭐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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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업뎃 넘 없는 김에... 쓴 지 한 달 넘은 것들... 다 조각인데 이 뒤가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에 막 쓰고 싶어지면 좋겠네... 세 개 다 



1. 쿠로오

사랑하는 척이라도 좀 해 봐, 입술을 물어 뜯으면서 그랬다. 갈라진 붉은 선에서 비린내가 난다. 걔는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목을 끌어 안으면서 발을 구르면서 발작했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싫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몇 번이고 씹었다. 걔는 영영 그렇게 기다릴 것이다. 자기에게 저주를 기다리는 저주를 내렸다. 끔찍했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 나까지 저주에 걸렸어. 걔를 놓아주었을 때 걔는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팔을 들어서 눈을 가렸다. 나는 어깨 부근을 주먹으로 마구 쳤다. 쟤는 자기가 너무 불쌍해서 우는 것이다. 


나는 그 모든 모르는 척에 질렸다. 입매가 단단했다. 열리지 않는다. 억지로 입을 비틀어 열어도 신음도 내지 않고. 차라리 걔가 나를 악몽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스가와라를 불쌍해하지 않을 텐데. 스가와라가 나를 악몽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서 제발 자기 앞에서 꺼지라고 하면. 팔을 내린 눈매가 부어있다. 눈 안에 핏줄이 섰다. 소매에 젖은 자국이 선명하다.


너는 네가 제일 불쌍하지.


나도 네가 불쌍해 죽겠어 씨발 진짜...


그래서.


씨발 이게 사는 건가. 스가와라는 인형처럼 늘어져 있다. 팔도 까딱 안 하고 자기가 울었고 상처받았다고, 그걸 모두 보라고 말하듯이 부은 눈을 내놓고 있다. 막 소리지르면서 따지고 싶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하나도 불쌍하지 않냐.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안다. 


내 시체를 상상할 수 있다. 여기 버려져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옆에 스가와라는 멀쩡하게 숨쉬는 주제에 더 죽은듯이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면 쟤 밥은 누가 챙겨주지. 초라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스가와라가 화풀이를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상처받은 건지 모르겠다. 유리구슬처럼 너머가 없는 눈동자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입을 꽉 닫고. 입술에 남은 상처를 노려보았다. 갈색 얼룩이 잠긴 입술에 번진다. 스가와라의 얼굴 전체로 퍼지고 그 애를 잡아먹는다. 종말이다. 스가와라가 제발 포기하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 쿠로오

추운 계절이다. 불씨가 공중으로 튀었다. 사람들은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추운 계절이라고 불렀다. 오래된 일이었다. 뿌옇게 흐려진 허공에 숨을 불었다. 계절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재앙. 어떤 종말.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 어쩌면 이쪽이 더 재앙에 가까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헛헛한 온기가 힘없이 흔들렸다. 몸을 말고 소매를 겹쳤다. 매일 재앙을 경신하고 있었다. 이 곳에는 하루에 두 번씩 열리는 문이 있다. 살인범이 버티고 있거나 치명적 바이러스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언제든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스프링이 다 죽어가는 매트리스 사이에 손을 찔러넣었다. 이미 짜부라들어 숨이 빠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거운 것으로 누르면 어디든 덜 추웠다. 문간을 쌩하니 노려보았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꼬리부터 불길에게 잡아먹히며 타닥타닥, 비명 소리를 냈다.


*

미친 새끼.

문이 열렸다. 나는 앞과 뒤 대신 중간의 갈색 봉투를 택했다. 안에서 냉동식품이 쏟아졌다. 전기가 지구를 떠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비닐을 이로 찢었다. 한심한 시선이 내게 와르르 쏟아졌다. 비닐이랑 같이 저 멀리에 밀쳐냈다.

처먹을 건 다 처먹고.

뒤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기서 지랄인데. 야. 섬세하지 못한 손가락이 무릎을 턱턱 두드렸다. 나는 무시하려고 종이맛이 나는 핫도그를 씹었다. 얼어버린 기름맛이 났다. 뱉고 싶다.

다음부터 핫도그는 가져오지 마.
명령질이야 아주.

너는 진짜 뭐가 문제야? 씨발 진짜 뇌 고장났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핫도그는 견딜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부 흙바닥이나 다름없어서 뱉을 곳이 없다. 기름에 절어있는 밀가루 덩어리를 꾹 삼켰다.

나 입에서 기름냄새 날 것 같아.
지랄 맞은 년.

그렇게 말하고 키스했다. 식용유에 절은 혀와 얼어서 촉각을 상실한 혀가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조우했다. 둘 다 장님이나 마찬가지여서 한참을 더듬었다.

이게 종말이야.
웃기고 있네.

웃지 않는 입을 잠깐 바라보았다. 얼어버린 지구에서 동사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내일이 종말이면 좋겠다.

내일이 되면 기름냄새나는 핫도그도 없고. 장님의 키스도 없고. 나는 숨을 정지하고. 여기서. 나는 문득 말하고 싶었다. 너 그거 알아?

여기서 우리 처음 키스했어.

덧붙일까 하다가 관뒀다. 울렁거리는 표정을 보니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3. 오이카와

바람이 휑하니 불었다. 모래가 섞여서 까끌거렸다. 뼈마디가 드러난 손이 모래 덮인 시멘트바닥을 두드렸다. 백조는 숲을 탈출했을까. 나는 백조의 제물이라서 덫에 빠졌다. 숲 안에서는 나무밖에 볼 수 없다.


너 말이야.

목소리는 혀를 타고 나온다. 입술이 말 끝을 먹었다. 한바퀴 돌아나오는 목소리라서 어눌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누런 흙바닥에 엉덩이를 뭉갰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갑자기 목덜미가 가렵다. 목을 쓸었다. 생채기는 남지 않겠지. 나는 상처입지 않은 성대를 가졌다.

알았으면 뭐가 달라져?

눈을 가늘게 떴다. 백조는 숲을 떠나서 사막으로 갔다. 그러라고 탈출시켜준 건 아닌데.

알았구나.

백조가 신음한다. 숲에서 도망치느라 발바닥에 가시가 박혔을 것이다. 아니면 심장에. 핏자국이 남았겠지. 까마귀가 백조를 따라가면 어떡하지. 나는 덫 안에서 한 발을 끄집어냈다. 나도 피가 난다.

부탁이니까 나를 위해서 그런거라고는 말하지 마.

피가 철철 난다. 백조는 아름다워서 기적같이 노래한다. 백조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노래한다던데. 하지만 사막에서 하얀 것들이 말라죽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너를 구했는데.

나는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밀랍 냄새가 난다.

너를 구했겠지. 오로지 너 자신만.

이기주의자. 나는 그런 말들로 상처받지 않는다. 내 성대에 흠집이 없는것은 그런 이유다. 사는데 편리하고 죽을 때쯤 무거울 것이다.

혹시 울어?

이건 순수한 궁금증이다. 이런 걸로 자살하지는 마. 그러면 나는 너를 구한 보람이 없으니까.

너를 저주할 수도 있을 것같아.

감미로운 단어다. 죽음을 앞뒀으니 더 그렇다. 제발 죽기 직전에 나를 떠올려서 저주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오래 저주받을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조는 웃는 법을 모른다. 옛날부터 몰랐다.

사랑해.

백조는 입을 벌리고 하하,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모든 울음은 모든 웃음인 법이다. 나는 최악의 연인을 획책했다.

나도.

언어를 오래오래 미워하자고 다짐했다. 오아시스를 잃어버린 백조가 죽기까지 다섯 걸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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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검은 호주머니 속의 산책(강성은) 이고요 글이랑 무슨 관계일까 너무 알고 싶다... 왜 제목이 이거지





1

카라스노는 그 날의 경기를 이겼다. 스가와라는 출전하지 않았고 사와무라는 출전했다. 경기가 끝나고 벤치에 있던 선수들까지 우르르 몰려가서 손바닥을 부딪혔다. 스가와라는 망설이다가 한 발짝 늦게 그 안에 뛰어들었다. 코트 안에 발을 딛는 순간 공기가 완전히 달랐다. 사와무라는 코트 한 구석에 서서 무릎을 짚고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젖은 유니폼이 몸에 잔뜩 달라붙어서 근육이 오르내리는 것까지 선명했다.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서 사와무라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주었다.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어서 누구인지 확인한 다음 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숨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미안해, 하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대답하는 대신 사와무라의 등을 팡 소리 나게 두드렸다. 사와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일으켰다. 스가와라는 눈을 완전히 접으면서 축하해,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후배들이 사와무라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스가와라는 뒤로 걸어서 네트를 빠져나왔다. 사와무라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졸업 전 마지막 경기였다. 스가와라는 출전하지 못했다.


혼자 나와서 경기장 주변을 걸었다. 자주 보아온 나무들과 익숙한 계단과, 언제나 더 높은 곳만을 보여주던 대진표나, 그런 것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코트 안의 공기를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한 번도 그것들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이제 자신을 떠날 것이다. 바람이 싸하게 불었다. 배구를 해서 돈을 벌고, 그걸 직업으로 갖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정말 배구를 할 일은 없다. 아예 없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스가와라는 속으로 작게 안녕, 이라고 말했다. 입 안에서 작게 울렸다.




2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와 함께 하교를 했다. 배구 경기가 끝났다고 해서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둘은 노란 표지판이 있는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갔고 거기서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서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배구를 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쓸모없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기는 전부 끝났으니까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역시 그리워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사와무라를 보았다. 사와무라는 눈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역광이 들어서 그림자가 눈동자를 가렸다. 사와무라는 입을 몇 번인가 열었다가 닫았다. 뭐라고 말할지 한참을 고르는 모양새였다. 스가와라는 흘긋 도로를 내다보았다. 사와무라가 타고 가는 버스가 저 너머의 골목을 돌아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초조하게 보았다. 사와무라는 그런것은 개의치 않는다는듯이 계속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너랑 배구를 해서 즐거웠어.


사와무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와무라는 항상 지나치게 다정한 구석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한 번 쓸었다. 버스가 금방 정류장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사와무라의 시선은 단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문이 금방 닫히고 버스가 떠나갔다. 바퀴가 구르면서 흙먼지가 일었다. 스가와라는 그제야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버스 지나갔어.


사와무라가 웃으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한 번 더 기다리지 뭐, 그렇게 말했다. 스가와라는 손으로 눈을 덮고 소리내어 웃었다. 


나도,


나도 즐거웠어, 간신히 말하고 나서 스가와라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시는 그 즐거운 시간이 오지 않을 것이다. 사와무라가 스가와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스가와라는 왜인지 모르지만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묵묵히 스가와라를 기다렸다. 


정말 즐거웠어.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사와무라는 어깨에서 손을 떼고 스가와라를 꽉 안아주었다. 팔에서 열이 확 올랐다. 배구를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슬픈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버스가 너머에서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둘 모두 버스를 놓치고 집으로 걸어갔다. 배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3

스가와라가 배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로 둘은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했다. 원서를 접수할 시기였다. 스가와라는 성적에 맞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미야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미야기에 있는 대학 어디로 진학할 것이다. 사와무라는 결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조금 욕심을 내서 도쿄로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 끝에 상담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너랑 같은 대학에 가면 좋을 텐데, 사와무라는 그렇게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정쩡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둘 모두 알았다. 사와무라는 아마 도쿄로 갈 것이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스가와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 조사표를 보이지 않게 뒤집었다. 사와무라는 지망 대학을 적어내는 조사표를 자꾸만 접었다가 폈다. 반듯한 선에 맞춰 종이가 매번 희미하게 옅어졌다. 


대학에 가면 아마 자주 못 보겠네.


그게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서 배구를 그만두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처럼, 누구를 보내주는 일도 아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일은 아닐까. 입술 사이로 숨이 빠져나왔다. 사와무라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고는 왜 벌써 걱정하느냐며 어깨를 탁 두드렸다. 


연락하면 되잖아.


사와무라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맞아, 스가와라가 한박자 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둘 모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스가와라는 과연 사와무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궁금했다. 조용한 사이에 교실 뒷문에서 모르는 얼굴이 사와무라를 불렀다. 잠깐만, 사와무라는 손을 내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을 둘이 대화했다. 스가와라는 그 모습을 보았다. 멀어지는 것은 사와무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랑 관계 없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팔랑팔랑 불었다. 사와무라가 뒤집어 두고 나간 조사표가 하늘거리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가와라는 허리를 굽혀서 조사표를 주워들었다. 몇 번 이름을 들어본 대학 옆에 운동특기자 전형, 이라는 단어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스가와라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한참동안 그 글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운동특기자. 사와무라는 배구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은 했지만 어쩐지 슬펐다. 이미 멀리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가와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떨어졌다. 스가와라는 그제서야 사와무라의 조사표를 책상 위에 얹어놓았다. 눈을 한 번 치켜떴다. 사와무라는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스가와라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4

집에 돌아가는 길은 노을이 붉었다. 둘은 아주 어색하게 굴었다. 서로 말하지 않고 정류장을 200미터 정도 지나쳤다. 스가와라는 살짝 옆을 올려다 보면서 낯선 사람, 이라고 생각했다. 


나 있잖아. 


사와무라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제서야 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불었다. 걸친 후드가 시끄럽게 흔들렸다. 사와무라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사와무라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특기자 전형을 제안받았어. 그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대학 관계자를 만났어. 경기하는 걸 여러 번 봤다고 하면서 자기네 학교에 올 수 있냐고 말했어. 그래서 명함을 받았고 아마... 거기로 갈 것 같아. 숨기려고 한 건 아니야. 언젠가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


사와무라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숨을 고르면서 사와무라를 올려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구나.

...

그러면 아마 도쿄로 가겠네. 


같은 대학은 가지 않겠구나, 스가와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와무라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얼굴 대신 정수리가 보였다. 스가와라는 오늘따라 바람이 차갑다고 생각했다. 매정하게 자꾸 불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축하해. 


스가와라는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걸어서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혼자 돌아오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를 아무거나 타고 창문을 내다보지 않았다. 버스는 덜컹거리면서 스가와라가 모르는 곳으로 마구 달려갔다. 아마 사와무라는 제대로 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제서야 그 말을 하던 사와무라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5

그 뒤로 스가와라는 오랫동안 혼자 하교했다. 사와무라가 몇 번이고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아닌 아이들과 밥을 먹고 간식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어색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가끔 친하지 않은 아이들이 사와무라와 무슨 일이 있느냐는 논조의 질문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졸업식 날 스가와라는 배구부원들에게 꽃다발을 받았다. 고마워, 라고 말했다. 눈물이 울컥 터졌지만 떠나는 사람의 눈물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로 사진을 찍었다. 사와무라는 끝까지 앵글 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모두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일부러 사진을 먼저 찍고 부모님과 함께 학교를 떠났다. 먼저 나가는 스가와라에게 몇 명인가가 우르르 달라붙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연락을 꼭 하겠다는 약속을 기꺼이 해주었다. 언젠가 이것들이 전부 그리워질 것이다. 떠나는 자동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익숙하게 낡아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풍경을 보면서 카라스노를 배구로 읽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6

대학에 들어간다고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어차피 미야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미야기로 대학을 갈 것이다. 스가와라는 평범하게 지냈다. 졸업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다가 사와무라의 메시지를 받았다.


일주일 후에 도쿄에 가.


그게 전부였다. 스가와라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는 대신 그 텍스트 덩어리를 몇 번이고 읽었다. 사와무라가 아주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문득 다시 생각났다. 따져보면 스가와라는 사와무라를 3년 동안 알아왔다. 가끔은 같이 경기도 했다. 아마 사와무라를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사와무라가 배구를 계속 하는 것은 아무 잘못도 아니다. 다만 스가와라는 그때 너무 큰 것을 잃어서 다른 것을 잃을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그저 시기의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메시지를 받고 3일이 지난 후에야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연결음이 딩딩, 귓가를 울렸다. 


여보세요.


윤곽진 목소리였다. 아주 익숙했고 그래서 스가와라는 아마 그 목소리는 자신이 가진 풍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야.

스가와라.

그 날 갈게. 몇 시야?


2시 기차야. 사와무라가 말했다. 2시.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어깨 사이에 얹어놓고 달력에 2시, 라고 적었다. 사와무라가 아주 희미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나야말로.


문자 보내줘서 고마워. 그날 봐. 끝 인사를 하고 나서도 둘은 한참동안 조용히 있었다.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스가와라는 지금 전화기 건너 편에 있는 사람을 생각했다. 생각해 봤는데.


네가 배구를 계속 하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사와무라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짧게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사와무라가 입을 다물고 눈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보고 있지 않았지만 선명했다. 정말 우스울만큼 선명해서 스가와라는 조금 웃었다. 사와무라는 그 웃음소리를 듣고는 조금 씩씩해진 목소리로 그러면 정말 그날 봐, 하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끊긴 전화기를 들고 혼자서 많이 웃었다. 


그날 만나면 아주 많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7

스가와라는 그 날 유독 늦게 일어났다.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나서야 핸드폰을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택시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2시를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온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절망적이었다. 기차는 떠났을 것이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세 시에 가까웠다. 스가와라는 텅 빈 기차역을 혼자 걸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늦었구나. 결국 또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철로가 끝없이 뻗어있었다. 사와무라는 그 보이지 않는 길을 갔을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다가 결국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희미한 죄책감마저를 안고 떠났을 것이다. 고르지 못한 숨이 반짝이는 철로를 따라서 갔다.   


떠나보내는 것들이 늘었다. 아마 자신은 영원히 도쿄에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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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소재 있어요(ㅠㅠ)



자란 동네는 아주 낡은 곳이었다. 가끔 바람이 골목길 사이로 기어들어와서 담벼락을 건드리면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골목을 전부 건너서 계단을 33개 오르면 녹슨 대문이 있다. 거기를 집이라고 불렀다. 바깥보다 안이 더 녹슨 건물이었다. 그 안에서는 곰팡이가 벽지의 끝자락을 먹고 자랐다. 겨울이면 수도관이 자주 얼어서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 덜덜 떨면서도 아프지 않았다. 모두들 가난해서 새삼스럽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오이카와를 만났다. 약간 반짝반짝거리고 좋은 냄새가 났다. 내게서 나는 가난의 냄새와는 아주 달랐다. 피부마저 그림자지지 않고 하얘서 대부분 그 애를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모두에게 친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누군가에게는 유독 친하게 구는 반면 누군가에게는 웃음조차 차가웠다. 오직 눈칫밥을 먹고 자란 애들만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애는 나를 아주 식은 눈으로 보았는데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 역시 나랑은 멀리 있는 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다였다.


체육 시간에는 체육복을 매번 빌릴 수 없어서 자주 아팠다. 혼자서 교실을 지켰다. 바깥에서 아이들이 체육복을 입고 뛰어다니면 창문으로 흙먼지가 들어왔다. 일부러 창문을 열어두는 날이 많았다. 흙먼지를 맞으면서 혼자 글자를 읽었다. 주인공이 아주 슬퍼지는 글자들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애들이 자주 불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날도 그랬다. 나는 내 것이 아닌 머리가 아팠고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햇빛이 날카롭게 내리쬐어서 더웠다. 피부에 흙먼지가 잘각대며 달라붙었다. 목구멍이 텁텁했다. 정수기는 복도를 빙 돌아가야 있었는데 그래서 체육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전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몇 명은 가끔 미리 부탁하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복도에 들어오는 햇빛을 전부 맞으면서 복도 끝에 다녀왔다. 물병이 많아서 책가방을 썼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창문이 닫혀 있었다.


교실에 혹시라도 도둑이 들었을까봐 조금 빠르게 걸었다. 아이들 모두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문을 열었을 때 오이카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잠깐 목을 다듬었다. 오이카와가 자기 것이 아닌 책가방을 도로 닫았다.


요시다가 부탁한 게 있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면서 항복하듯이 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하얬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래, 하고 대답했고 그날 종례 시간에 요시다는 발표하듯이 손을 들고 지갑이 없어졌어요, 하고 말했다. 오이카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그 애는 딱 한 번 나를 돌아보았는데 아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의식하면서 벌어진 입을 닫았다.


그 후로도 지갑이 가끔 없어졌다. 담임은 복도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식으로 범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묵인했다. 오이카와는 그 후로도 나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이나, 반성이나, 뭐 그런 말들. 대신 나를 보는 눈이 조금 따뜻해졌다. 어느 쪽이든 별로지만 뭐라고 말하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가 어쩌면 그렇게 멀리 있는 애는 아닐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되어서 반이 바뀌었다. 나는 그 애를 복도에서도 마주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에는 사와무라가 꽃다발을 주었다. 우리는 둘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크게 감격했다. 그리고 오이카와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 애의 손은 텅 비어있었다. 나는 사와무라에게 받은 꽃다발을 뒤로 감췄다. 우리는 어떤 축하의 의미도 없이 졸업 사진을 찍었다. 번호 줘, 사진 보내줄게. 오이카와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핸드폰이 없어서 대신 이메일을 적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앞 마당에 쌓인 눈을 쓸면서 그 사진이 좀 웃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대학은 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도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서 아깝지는 않았다. 사와무라는 자기 아버지가 하는 고물상 일을 물려받을 거라고 말하면서 술을 마셨다. 나는 일을 물려줄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들었다. 신문의 구직란을 뒤지면서 조금 시간을 허비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주급으로 받을 것, 점심을 줄 것. 그런 가게를 하나 찾았다. 낡은 술집이었는데 동네의 그 꼬불거리는 골목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 오직 그 가게를 아는 사람들만이 오는 그런 가게. 차라리 나았다. 


그리고 거기서 오이카와를 만났다. 가게를 들어서는 그 애는 여전히 반짝거리고 하얬는데 어쩐지 나는 그 애가 가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가면 좋은 냄새가 났다. 오이카와는 체육 시간에 텅 빈 교실에서 나를 마주쳤을 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복한 것처럼 손을 드는 일은 없었다. 


오랜만이네.


오이카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러게, 라고 말했다. 메뉴판을 건네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일해?

그래.


오늘 끝나고 볼까.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했다. 아주 웃기다고 생각했다. 약간 여자를 꼬시는 말 같기도 했고 오래된 친우에게 건네는 말 같기도 했다. 어쨌든 나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가 소리내어서 웃었다.


나는 한 시에 집에 가. 


오이카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일하면서 맥주를 마시는 그 애를 조금 훔쳐보았다.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등이 굽었다. 과거를 변명할 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 어울리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 애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조금 쓸쓸해 보였다.


일을 마치고 나는 그 애를 불렀다. 키가 컸다. 고등학생 때도 이렇게 컸었나. 오이카와는 눈을 비비면서 이제, 라고 말했다. 조금 고민하는듯이 끝이 없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나는 그 애가 나의 가난을 비웃지 못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들어가면서 편의점에서 술과 기름에 튀긴 과자를 조금 샀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봉지를 들고 좁은 골목을 둘이 걸었다. 그 애는 서른 세 개의 계단을 마주하고는 조금 웃었다. 나는 계단을 한 번 찼다. 모래가 바스러졌다.


여기 계단은 딱 서른 세 개야. 


항상 여기를 올라갈 때마다 생각해. 오늘도 계단을 오르는구나, 하고. 아마 언젠가 서른 세 개를 다 걸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그런데 항상 마지막이 되면 발을 헛디딘다. 거기에 뭐가 있나봐. 아무튼 그러면 나는 마지막 계단을 건너뛰어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서른 두 개밖에 걷지 못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하나가 언제 나타날지는 모르게 돼.


나는 비밀스럽게 말했다. 사와무라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다. 사와무라는 자기 계단을 갖고 있으니까 알 것이다. 오이카와는 동의하는듯 아닌듯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면서 머리카락이 갈색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 애랑 서른 세 개의 계단을 걸었다. 정말로 마지막이 되면 힘들어져서 발을 헛디뎠다. 건너뛰기 전에 오이카와가 팔을 꼭 붙들었다.


오늘은 괜찮을 거야.


그 애의 머리카락이 팔락였다. 나는 갈색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른 세 개의 계단을 전부 밟아서 집에 도착했다. 평상에 누워서 맥주 캔을 땄다. 거품이 부그르르 일었다. 알루미늄 캔을 부딪혔다. 맥주가 조금 흘렀다.


이름이 스가와라지.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한 번도 그 애가 내 이름을 알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질문에 답을 얻었다. 내 이름을 아는구나, 멍하니 말했다.  


다시 볼 거라고 생각해서.


이름을 알아뒀어. 그런데 여기일줄은 몰랐고. 그 애가 덧붙였다. 그건 내가 그 애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한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오이카와가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알고 있었지?


내가 너랑 비슷한 곳에 사는 거. 나는 고개를 저어야 할지 아닐지 몰랐다. 처음 들었지만 모르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스러미가 잔뜩 덮인 평상 위에 오이카와가 등을 눕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별이 반짝거렸다.


나 그거 숨기려고 고등학생 때 엄청 노력했는데. 근데 너한테 걸려서 망했어.


하하, 하면서 그 애는 웃었다. 나는 별로 우습지 않았다. 탄산이 탁, 하고 터지면서 목을 타고 지나갔다. 


그래서 3학년 때 엄청 조용하게 살았잖아. 나 겁 엄청 많거든.

내가 말할까봐?

그건 아니고.


나는 그 애 옆에 누웠다. 별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팔을 뻗어서 튀긴 과자를 집어먹었다. 바스락바스락, 별들이 폭발하는 소리가 입 안에서 났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가난해보이는 게 싫었지, 라고 말하면서 그 애는 웃었다. 나는 그 애가 그렇게 자주 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결국 이렇게 될 걸.


그 애는 변명을 몰랐다. 가난이 우리의 모든 방패막이었다. 나는 그 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그 애는 가난하게 살았다. 위로나 자책이 없더라도 우리에게 죄를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날 맥주를 한 번 더 사러 다녀왔다. 계단을 다시 오를때는 둘 모두 취해서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쓸모 없게 웃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그 애는 자기 번호를 적어주었다.


사진은?


아 맞다. 보내줄게. 오이카와는 자기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가게로 출근했다. 번호는 잊어버렸다. 오이카와는 두 번 찾아오지 않았고 사진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


그 애가 찾아오지 않고 새해가 되었다. 술집은 가난했지만 판촉용으로 달력을 만들었다. 종이가 빳빳했다. 장을 넘길 때마다 꺾이지 않은 소리가 났다. 이 낡은 가게에 그런 새 물건이 있는 것이 이상하고 좋았다. 낡은 것들을 오래 보아서 별 거 아니어도 새 것을 받으면 가슴이 벅찼다. 사장은 혀를 차면서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애도 나같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빳빳한 달력을 두 개 챙겼다. 집에 가서 낡은 벽지에 새 달력을 걸었다. 저들끼리 싸우면서 뽀득대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뿌듯했다.   


매일 퇴근하고 집에 가서 달력을 넘겼다. 분명 새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낡아가고 있었다. 조금 서글펐다. 빨리 달력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게 슬퍼서 퇴근을 천천히 했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낡았으면, 하고 바랐다. 녹슨 철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계단을 똑바로 걸었다. 스무 개를 넘어가면 슬슬 숨이 찼다. 헉헉대면서 문을 열었다. 


안녕.


그 애는 자기 집인 것처럼 우리 집에 있었다. 뭐야 너, 혀를 찼다. 이번에는 내가 항복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조금 웃겼고 우리는 또 술을 마셨다. 1년 정도 낡은 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 말이야, 도쿄에 갈 거야. 그 애는 낡은 평상에 앉아서 단호하게 말했다. 발음이 살짝 씹혔다. 나는 그 애를 잠깐 바라보았다. 아는 형이 있는데, 이번에 도쿄에 간대. 나를 데려갈 수 있다고 해서. 우리랑 어울리지 않게 신중하게 말했다. 나는 그 애가 내 예상과 다른 애라는 것을 알았는데 조금 새로웠다.


잘 되면 꼭 부를게.


과연, 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후다닥 뛰어 들어가서 그 애에게 달력을 떠안겼다. 그 애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시 손에 들린 것을 보았다. 당황하는 대신 완전 새 거네, 하면서 웃었다. 조금 안심했다. 나를 부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가난해도 괜찮을 것이다.


꼭 불러.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쨌든 잘 되기를 바랐다. 그 애는 가난해서 나보다 더 힘들었을테니까. 우리도 조금 원하는대로 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나보다 운이 좋을테니까 그 애에게 내 기적까지를 주었다. 우리는 또 쓸모 없이 웃고 마셨다. 이번에는 마치 마지막이라는듯이. 


다음 날 다시 말했다. 사진 보내. 아주 엄중한 경고를 내리듯이. 그 애는 똑같이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맞다, 보낼게, 라고 말했다. 나는 세 번째로 메일 주소를 적었다. 그 애의 수첩은 매 번 똑같았다. 나는 정말로 그 애가 가난해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일 주일을 기다렸다. 이번에도 그 애는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



*


해가 바뀌었다. 가게는 달력을 만들지 않았고 부고는 우편으로 왔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슬프다기보다 멍멍한 채로 휴가를 내고 도쿄에 갔다. 여기 주소가 있어서요, 그렇게 경찰이 말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희한하게 보았다. 경찰은 연락할 주소가 여기밖에 없었다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혈연도 죄였다. 나는 십분 이해했다.


유품은 저기서 확인하시면 돼요.


걸음이 천천히 움직였다. 유품. 그 애의 그 수첩이나 뭐 그런 걸까 생각했다. 남길 게 몇 개나 있었을까. 가난은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애의 몫까지 가난하고 싶었다. 받아든 상자는 작고 가벼웠다. 복도에 나와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수첩, 볼펜 하나, 동전 몇 개. 아주 초라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조금 슬펐다. 수첩 사이에 삐죽 무언가가 튀어나와 있었다. 직 잡아당기자 사이에 끼워진 종이 조각이 힘없이 딸려나왔다.


초라한 종이 위에 우리의 초라한 졸업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 처음보는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내 옷 뒤로 어쩔 수 없이 삐져나온 꽃다발이나 어쩐지 어정쩡한 표정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학사모나 그런 것들. 그렇구나, 그 애가, 그 어색함이, 그 가난이 죽었구나. 갑자기 서글펐다. 나는 이 사진을 조금 더 전에 보았어야 했는데. 생각해온만큼 우스웠다. 울고 싶었다. 


집에 가볼 수 있어요?


경찰관이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가 집인데 혼자 쓰는 곳이 아니라서 뭐... 말끝이 흐려졌다. 괜찮아요. 그냥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의 남은 물건이나 그런 것들이 보잘것 없어도 좋았다. 경찰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소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곳을 찾아갔다. 여럿이 쓰는 공간인듯 보는 것만으로 시끄럽고 낡아있었다. 그 애는 도쿄에서도 가난했던 것이다.


낮에 방문해서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잠깐 걸었다. 금방 그 애의 자리를 발견했다. 이 곳과 어울리지 않게 하얀 달력이 걸려 있었다. 그 애가 새것을 많이 가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달력은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물건을 전부 통틀어도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애에게 줄 달력이 더 없어서 슬펐다.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우리는 가난해도 새 것같은 물건을 더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 애에게 새 것인 사랑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나는 이제 낡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애가 나에게 남긴 낡은 사진을 떠올렸다. 우리는 같이 가난했는데. 달력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미야기로 돌아와서 달력 대신 낡은 사진을 걸었다. 조금 울었다. 혼자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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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시점에 카게야마 16살 스가와라 20살로 생각하고 시작했습니당...ㅠㅠ




빗소리가 난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었다. 젖은 냄새와 희미한 물안개가 기도 안으로 밀려든다. 경계를 표시하는 이정표는 오래 전에 색이 바랬다. 글자 중간이 떨어져 나가 원래의 의미를 잃었다. 그러니까 숲은 열려있는 셈이다. 입술을 깨물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는다고 딱히 괜찮지는 않다. 나무 껍질을 더듬는 손이 조금 미적거렸다. 숲에서는 산 것들의 기척이 난다. 낙엽을 밟는 들짐승의 발 소리. 산새의 울음 소리. 들꽃이 느리게 키를 키우는 소리. 숲 안 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끝이 갈색으로 변한 이파리들이 발치에 쌓인다. 그 시간들을 느리게 마음 속에 새겼다. 걸음을 딛었다. 자리마다 아파서 벌레들이 울었다. 서리가 맺힌 폐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숨을 뱉었다. 공기가 부족해져서 대신 안개로 숨쉬었다. 흩뿌연 너머에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이기를 빌었다.



*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사람을 알았다. 다정하다고 자주 생각했다. 웃음의 자리가 그의 자리여서 그림자마저 햇빛을 반겼다.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밝아서 다들 스가와라의 밝음을 누렸다. 당연하게 소비했고 당연하게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정과 유약을 자주 혼동해서 읽었고 종종 그 착각을 스가와라에게 강요했다.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런 착각마저 내치지 않았다. 그건 숲에서 ‘그것’이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한 사람을 바쳐. 그게 조건이야.’


괴물의 몸에서는 점액 덩어리가 뚝뚝 흘러내렸다. 덩치가 커서 마을을 전부 그림자 속에 가뒀다. 사람들은 태양을 보지 못하면 죽는 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숲을 오래 방치한 것은 결과적으로 괴물을 방기한 것이었다. 유예된 일 주일 동안 괴물은 마을 주변을 빙빙 돌며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를 냈고 그때마다 출처 모를 잿더미가 자꾸만 바람에 실려 왔다. 사람들은 식탁과 그릇을 자주 씻어야만 했다. 모두들 집 안에 머물렀다. 침묵으로 6일을 낭비하고 난 후에 사람들은 스가와라를 찾아갔다. 그들 중 누구도 스가와라에게 거절당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때 컵을 씻고 있었다.

 

자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아주 비겁한 권유였다. 카게야마는 그 말이 뱉어지던 때에 스가와라와 있었다. 웃기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스가와라가 막았다. 잠깐 맞닿은 시선에서 카게야마는 뜻을 읽었다. 스가와라는 말 없이도 카게야마에게 말할 수 있었다. 촌장이 주저하며 마저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가족이, 있으니까... 토비오는 우리가 잘 돌보겠네.


카게야마는 촌장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뱉어진 문장 전부가 무례였다. 너무 멀리서 불리운 이름과 악의적으로 편집된 관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의 자리를 비워둔 말들이 카게야마를 괴롭혔다. 스가와라의 입술은 한참동안 열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간절하게 빌었다. 나도 가족이라고 말해요, 말해요, 말해요.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촌장의 얼굴 뒤에 비치는 만족감을 똑똑히 읽었다.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스가와라는 촌장 일행이 떠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 후에 무너졌다. 카게야마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정이 카게야마를 꼭 안았다. 마른 팔이어서 힘이 없었다. 그의 슬픔이 카게야마도 무너지게 했다. 맞닿은 뼈를 통해서 비탄이 흘렀다.


 카게야마.


젖은 이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가라앉았다. 카게야마는 그때 더 이상 어리지 못했다. 꾹꾹 눌러담은 두려움이 틈새로 비집고 나와 얼굴까지를 채웠다. 어깨에 와 닿는 머리카락이 카게야마의 심장을 자꾸 찔렀다. 조금 더 자랐더라면, 하고 바랐다. 스가와라의 어깨가 자꾸만 흔들렸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젖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왜인지 스가와라가 희미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려워서 자신의 다정을 꼭 끌어안았다. 


꼭 데리러 갈게요.


선언같은 말이었다. 어설픈 치기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울음과 웃음이 섞여들어 낯선 얼굴을 만들어냈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을 갈비뼈 어귀에 조각했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울음이 흐르는 소리는 깊은 곳에 출처를 두었다.


기다릴게.


깊은 허무의 말이었다. 속이 텅 비어있었다. 카게야마는 처음으로 다정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슬퍼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데리러 갈게요, 기다려요... 스가와라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젖어드는 어깨를 애써 무시해야 했다. 슬픔이 새로운 괴물이었다. 그들은 함께였지만 그저 괴로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괴로움과 눈물과 한숨에 불구하고 떠나가야 하는 사람은 떠나가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옷자락이 끈적한 점액에 젖어드는 것과 그 옷자락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것까지를 똑똑히 보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스가와라의 마지막 말을 떼어냈다. ㄱ과 ㄹ과 몇 개의 모음들. 젖은 채로 태어난 말들이어서 잘 보이는 곳에서 건조시켰다. 마지막이 아니라고, 아니게 만들 거라고 그 말에 대고 다짐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성인이 되었다. 필요한 것은 시간 뿐이었다. 촌장은 일말의 동정으로 카게야마의 생사에 신경썼다. 그게 죄책감이나 자책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뻔했다. 카게야마는 그의 마음이 까맣다는 것을 그 일이 있었을 때 이미 알았다. 함께하던 일들을 혼자 하면서 살았다. 자잘한 집안일부터 돈을 벌고 사냥을 하는 등의 일들. 다정이 떠나갔기 때문에 카게야마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그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빠지지 않고 갈비뼈를 들여다 보았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도하듯이 찾으러 가겠다고 되뇌었다. 머무르는 것은 기만이었다. 그의 본질은 이곳이 아니라 숲에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게야마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잘 보이는 곳에 붙였던 글자의 끝이 너덜거리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떠나기 위해서 짐을 챙겼다. 촌장은 카게야마를 모른 척 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마을 안의 사람이었고 감히 숲에 관여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집을 나서면서 스가와라만큼 용감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란 후라서 그게 용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발 끈을 꽉 동여맸다. 아무것도 흘러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세게 묶었다. 그 때 신발 끈을 묶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뒤늦은 후회도 잠깐 했다. 그것 역시 흘러나가지 못했다.


숲으로 향하는 카게야마를 사람들은 관조했다. 카게야마는 이제 그들을 과거처럼 볼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오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누구도 다정을 알지 못하게. 걸음을 떼었다. 돌아오는 걸음과 떠나는 걸음의 차이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다.



*


숲의 안은 어두웠고 축축했다. 이름 모르는 식물들이 시야를 채웠다. 사람들은 숲을 오래 멀리했기 때문에 숲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카게야마에게도 그랬다. 몇 년 동안 닥치는대로 숲에 관한 정보를 모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었다. 모험가들에겐 시시한 곳이었고 주민들에게는 두려운 곳이었다. 카게야마는 첫번째 탐험을 시작한 셈이었다. 아, 카게야마는 생각을 정정했다. 가장 먼저 있었던 사람은 스가와라다. 자신은 그를 쫓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빛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와중에 숲 초입부터 애매하게 내리는 비는 자꾸만 흘러 어깨를 적시고 신발을 적셨다. 젖은 천이 습기먹은 살갗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카게야마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름 모르는 동물의 꼬리가 나무 둥치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나무 뿌리를 밟고 섰다. 둥, 둥, 미묘한 진동이 나무를 타고 전해졌다. 나무를 조금 더 타고 올랐다. 굵은 기둥에 등을 기댔다. 기댄 나무는 잎이 넓어서 비를 가렸다. 가지 끝에서 다람쥐가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사람은 아니어도 같이 비를 피하고 있는 것이 퍽이나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나 말이야, 사람을 찾고 있어.


아무도 듣지 않겠지만 말했다. 눈 앞의 꼬리가 오른쪽으로 한 번 흔들렸다. 듣고 있다는 표시 같아서 카게야마는 조금 웃었다. 오랜만의 웃음이었다.


하얗고 다정한 사람이야.


뭘 하고 있는 걸까. 조금 우스워서 손을 한 번 내젓고는 입을 닫았다. 비는 끝도 없이 내렸다. 물 냄새가 자꾸만 났다. 안개와 합쳐져서 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스가와라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했다. 순간 조금 더 거세진 진동이 나무 기둥을 가격했다. 카게야마는 중심을 잡기 위해 가지를 꼭 붙잡았다. 다람쥐가 기둥을 타고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쩐지 불길한 냄새가 났다. 카게야마는 마치 그 사이에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혼탁한 시야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아.


단말마의 신음이 저도 모르게 샜다. 뿌연 물안개 속에서 마을을 습격했던 그 괴물이 형체를 드러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작았지만 형태가 여전했다. 그 때는 자신이 얼마나 작았던가 새삼 돌이켰다.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잠깐 숨을 참았다. 괴물은 꼬리를 질질 끌며 나무 옆을 지나갔다. 끝에 달린 돌기가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세차게 튀어서 진동을 만들어냈다. 카게야마는 나무 줄기를 더 꼭 붙잡고 괴물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아주 오래처럼 느껴졌다.


괴물이 아주 멀리까지 가고 나서 카게야마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꼬리가 끌리면서 흔적을 남겼다. 괴물이 지나간 자리는 전부 풀이 모로 누워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흔적을 따라 거꾸로 걸었다. 걸음은 조금 느리고 신중했다. 딛는 발걸음이 자꾸만 망설여졌다. 카게야마는 사실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알았다.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안개처럼 카게야마를 감쌌다. 나이보다 웃자란 아이에게도 벅찬 일이 존재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그런 끝일지라도 자신이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끝에 도착해서 그 울음 가득한 얼굴을 놓아주어야 하니까. 입술을 한 번 쓸고는 계속 걸었다. 가끔 카게야마를 신기해하는 동물들이 다가왔다가 카게야마가 가는 방향을 쫓지 못하고 도로 멀어졌다. 긴장감이 자꾸만 차올랐다. 보이지 않게 기도했다.



  

*


어느 걸음을 내딛었을때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그곳이 괴물의 은신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발자국으로 분위기가 뒤바뀌어 묘하게 안개가 밝은 구역이었다. 광원이 흐릿한 안개 너머로도 선명했다. 가까이 가도 괜찮을까, 답을 내리기 전에 이미 향하고 있었다. 방문자를 환영하는듯한 빛이었어서 이끌리듯이 그곳으로 걸었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 다다라서, 카게야마는 오래 기다린 것을 확인했다.


카게야마.


깊이 간직해 온 것이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렀다. 카게야마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카게야마는 오래 전에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사람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그저 스가와라 코우시를 알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스가와라 씨.


이름 하나가 카게야마를 두 번 무너뜨렸다. 다리가 흐늘거리면서 내려앉았다. 스가와라가 미끄러지는 걸음으로 카게야마에게 다가왔다. 스가와라의 몸 구석구석에 피어있는 꽃이 카게야마를 아프게 찔렀다.


정말 왔구나.


매일 꺼내보았던 얼굴이 다시 카게야마의 눈 앞에 있었다. 우는지, 웃는지, 단언할 수 없는 아릿한 얼굴이다. 눈과 코와 입이 얼굴 위에서 떠다닌다. 카게야마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괜찮다. 이제 행복해질 것이다.


이제야, 왔어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요...


안개처럼 말 끝이 흐릿했다. 카게야마가 손을 내밀었다. 스가와라는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갈 수 없어, 말은 아주 멀리서 왔다. 스가와라가 몸 여기저기에 돋아난 꽃을 가리켰다.


나는 이제 이 숲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거야. 


눈물이 하얀 얼굴을 타고 흘렀다. 피어있는 꽃들이 탐욕스럽게 그 눈물을 삼켰다. 카게야마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침묵했다. 


네가 와줘서 그걸로 됐어.


웃음이 울음보다 서글펐다. 얼굴이 자꾸만 젖어간다. 카게야마의 세상은 언제나 젖어 있어서 그를 심해로 데려가기만 했다. 뻗는 손 끝이 원하지 않게 흔들렸다.


그, 그래도...

내가 돌아가면 또 다른 사람이 와.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 그게 최선이야.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용기를 진즉에 알았지만 언제나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스가와라만큼 용기있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요만을 뱉었다. 고요의 암흑이 카게야마의 성대를 좀먹었다. 스가와라가 사람이 아닌 팔을 들어 카게야마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냥 그걸로 됐어.


나는 괜찮아, 스가와라가 말했다. 그의 다정이 심해까지를 비췄다.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었다. 


저는요.


저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요를 뚫고 나온 목소리는 곧았다. 스가와라가 멈칫했다.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가와라가 팔을 뻗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꽃 향기가 피었다. 차라리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카게야마의 말에 스가와라가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왔어요.


왜인지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스가와라가 고개를 떨궜다. 꽃들이 같이 꽃잎을 떨궜다. 카게야마가 무작정 스가와라를 끌어안았다. 꽃들이 아우성치면서 카게야마를 아무렇게나 찔렀다. 더 세게 끌어안았다. 어디선가 피가 나는듯이 축축했다. 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스가와라가 몇 번인가 어깨를 떨다가 멈췄다. 카게야마, 이름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카게야마는 젖은 이름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모아 넣었다. 


기다렸어.


비로소의 진심이었다. 끝자락이 덜덜 떨렸다. 오래 쌓아온만큼 무거워서 4년 전의 그때처럼 둘이 함께 무너졌다. 둘 다 한치도 변하지 못해서 이번에도 괴로워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같이 있어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스가와라가 떠다니는 이목구비를 붙잡으며 끄덕였다. 진동이 다가오는 것을 둘 다 모른척했다. 손을 꼭 붙잡았다. 


이게 끝이야.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말이 떠돌았다. 둘 모두 동의했다. 다시 만나. 이것 역시 출처를 모를 말이었다. 함께 눈을 감았다. 심해로 빠져들었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막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거 별로라고 생각하는데 블로그 너무 방치하는 기분이 들어서 올리는ㅠㅠ 나중에 수정해서 이 문장 삭제하고 싶당... 근데 수정은 꼭 할 건데 길이가 원하는 만큼 나올지는 지금은 알 수 없는ㅠㅠㅠㅠ 아 제목은 또 왜 저래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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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라도 깔아야겠고... 이렇게 나도 모를 걸 올려도 되나 싶고... 구여친이 언급된답니다...  







스가와라는 태어났을 때부터 버려졌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머리카락 색깔마저 옅었고 무게가 없었다. 발견되었을 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고 했다. 그를 키운 마담은 술을 마시면 가끔 그 이야기를 하며 킬킬대곤 했다. 그 어린 아이가 말야, 뭘 그렇게 붙잡고 싶었는지. 스가와라는 말 없이 마담의 술잔을 채웠다. 마담의 눈은 예전에 죽었다. 시체의 눈이 스가와라를 길게 훑었다. 그런것 치고는 잘 자랐지. 그것 역시 습관같은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오리로 태어났으니 백조는 될 수 없다. 마담은 자주 스가와라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더 드세요. 투명한 액체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난다. 이곳의 모든 것들은 저 냄새에 절었다. 씻을 수 없는 출신의 냄새다. 마담은 그 오욕을 잘도 삼켰다. 그녀는 오래 이곳에 있었지,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녀가 아니다. 액체가 줄줄 흘러 소파를 적셨다. 마담은 알코올에 절어 자신이 젖는 것도 모른채 즐거워했다. 무지가 그녀를 구원했다. 하지만 모성애의 부재는 스가와라를 일깨우고 말았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그늘만을 보고 자라서 많이 물들었다. 알코올이 흐른다. 스가와라는 발 밑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밖에서 기다리던 사와무라가 물었다. 사와무라도 이곳에 오래 있었다. 스가와라는 가끔 사와무라가 이 장소와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천박한 붉은 조명과 헐벗은 사람들의 자리다. 알코올이 모든 것을 절여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괜찮아, 스가와라는 대답했다. 사와무라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스가와라가 손을 내저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괜찮아.


스가와라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웃는 것은 어느 남자에게 웃지 않는다고 뺨을 얻어맞은 후로 배웠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윤곽이 단단해서 자주 가면에 균열을 냈다. 시선이 균열을 꿰뚫었다. 스가와라 자신도 이제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나 들어간다. 뒷정리 좀 해줘. 


스가와라가 눈짓하자 사와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발자국 소리가 좁은 홀을 울렸다. 뒷문은 열려있다. 붉은 등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벗어나자 파스텔톤의 공기가 만연했다. 모르는 새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지만 스가와라의 해는 이 시간에 진다. 스가와라는 잠깐 멈춰섰다. 마지막의 태양빛을 붙잡기라도 하려는듯이 손을 뻗었다. 레고 블럭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손에 가려졌다가 도로 비친다. 스가와라가 내뱉는 숨은 알코올과 같아서 쉽게 증발했다. 담은 것이 많아서 버티느라 무거운 숨들과는 다르다. 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까만 그림자만 뒤를 따랐다. 




*


스가와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사와무라다. 스가와라는 이곳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아, 하고 입을 열자 탁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세 시야. 사와무라가 시계를 가리켰다. 스가와라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잠이 자꾸만 달라붙는다. 악몽처럼. 그렇지, 꿈을 꿨다. 하얀 옷을 입은 어머니가 나왔다. 그러니까 잠이 달라붙는 것은 거짓말을 꿈꾼 벌이다. 괴롭다. 어쩐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 안 어딘가가 시리다. 꿈은 아무래도 좋으니 누워만 있고 싶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사와무라에게 대답했다. 


고마워.


사와무라는 응, 하고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잠깐 이불을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담은 스가와라를 동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줍잖은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주 아파서 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이 펄펄나고 얼굴이 창백해져 버려서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이라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늘 앓던 것을 앓고 있을 뿐이었다. 사와무라만이 스가와라를 관조했다. 아직 죽지 않은 눈동자가 또렷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부딪힌 것은 처음이라서 스가와라는 잠깐 머뭇거렸다.


너 어디 아파?


단단한 윤곽이 다시 스가와라를 파고들었다. 단단한데 날카롭지는 않았다. 모서리가 푹신한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무심코 긍정할 뻔 했다.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도로 얼굴을 들었다. 가면이 얼마나 튼튼한지 모르겠다. 걱정되었다. 그냥 졸려서 그래, 스가와라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거짓말 하지 마.


스가와라는 짧게 웃고 대답했다.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해? 사와무라는 말하지 않았다. 고요가 아무도 모르게 흔들린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다시금 그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아니라면 그는 틀림없이 오전 6시에 일어나서 만원인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저만큼의 중량감을 갖고 저런 숨을 뱉는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렇지만 그게 전부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에게 무엇을 필사적으로 숨길 의무는 없지만 모든 것을 말해야 할 의무도 없다. 그는 스가와라에게 외부자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가까워지지 않고 가깝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숨길 수 있다. 영원히 이 평행궤도를 달릴 것이다. 스가와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가와라의 발 밑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있다. 팔을 펴고 균형을 잡는다. 몸이 곧게 선다. 웃음의 껍질이 후드득 떨어진다. 사와무라에게까지 닿는다. 나 씻을게.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밀도가 높아서 그는 눈이 없어도 앞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단단한 사람들은 태어났을 때 무엇을 쥐고 있었을까 생각했다. 허공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와무라는 여기에 있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앞을 가렸다. 문득 사와무라에게서는 알코올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지럽다. 어지럼증이 스가와라를 하루 종일 싸고 돌았다. 손님을 받는 도중에도 그랬다. 흔들리는 숨소리와 달아오른 살이 파편처럼 뇌에 박혔다. 쾅, 쾅, 소리를 내면서. 머리가 침대에 부딪혔다. 아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딘가가 고장났다. 그게 평소의 고장난 곳인지 아니면 새로 고장난 곳인지 모르겠다. 고장나 다물리지 않는 입에서 소리가 계속 멋모르고 새어나간다. 낡은 이불을 말아쥐었다. 벨소리가 난다. 시간이 끝났다. 쾅, 쾅, 쾅. 머리가 자꾸 흔들린다. 혼미하다. 평소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뇌에 낀 안개가 스가와라의 말을 전부 먹었다. 대책없이 흔들리고 있다. 고개가 우로 꺾였다가, 아래로 처박혔다가, 어딘지도 모르게 들렸다가. 벨소리가 다시 난다. 팔을 뻗어서 받으면 된다는 걸 아는데. 무기력이 스가와라의 팔을 가져갔다. 쾅, 쾅, 쾅... 


실례합니다.


친절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흐려진 머릿속을 각진 목소리가 찌른다. 스가와라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알코올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떨어져 나갔다. 스가와라는 걸레같은 이불짝을 둘렀다.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방금의 남자는 스가와라와 몸을 섞어서 흔들리는 걸음으로 걸었다. 남자도 이제 병을 앓을 것이다. 걸음을 저는 남자는 팔이 멀쩡해서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스가와라는 혼자 남았지만 오후 세 시의 시선이 열린 문 사이로 스멀스멀 새어들어왔다. 스가와라를 향했다. 들어와도 돼. 스스로도 목소리가 어지간하다고 생각했다. 딱딱한 구두굽 소리가 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사와무라.


스가와라는 그 발소리가 아주 가까워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사와무라가 미간을 좁혔다. 여태 스가와라를 위해 인상을 찡그려주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나 아픈 것 같아.


사와무라는 타박하지 않는다. 다만 손을 뻗어 스가와라의 이마를 짚었다. 미지근한 손이 닿았다. 미간에 골이 패인다. 너 좀 쉬어야겠다. 사와무라는 지극히 상식에 가까운 센스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한다. 참을 수 없는 돌출지점이다. 스가와라가 웃었다. 약 먹으면 괜찮아. 사와무라는 한숨을 쉬면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어깨가 반듯하다. 그런데 가게에 약 없어. 스가와라가 덧붙였다. 사와무라가 눈을 돌렸다. 사와무라의 시선은 휘는 법이 없다.


나와.


사와무라가 침대 건너편에 던져진 옷가지를 눈으로 찍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스런 배려다. 스가와라는 마음이 쉽게 닳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와무라를 보면 딱히 그런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태양 대신 붉은 등을 보고 사는 사람들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사와무라는 무엇을 보고 살고 있나. 닫힌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저 문은 처음부터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얇은 옷을 걸쳤다. 사와무라는 스가와라의 복장을 보고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입술이 잠깐 움직였다가 도로 다물렸다. 스가와라는 모른 척 했다.


약으로 괜찮아?


스가와라는 잠깐 사와무라를 올려다 보았다. 사와무라의 시선은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다. 잠깐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차가운 바람이 스가와라를 쓸었다. 스가와라가 어깨를 움츠렸다. 드물게 마주하는 달은 스가와라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와무라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스가와라를 보았다.


나 달 오랜만에 본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뱉어놓고서 잠깐 후회했다. 민망함에 말을 이었다. 여기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너는 여기 얼마나 있었어? 스가와라는 자연스럽게 반말로 덧붙였다. 사와무라가 잠깐 멈칫했다. 숫자를 천천히 셌다.


잘 모르겠네. 한 6년.


사와무라는 머쓱한듯이 말했다.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6년은 사와무라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23년이면 달랐을까 생각했다. 자신만큼 오래 이곳의 불빛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고생했네. 

나도 내가 이렇게 오래 있을줄 몰랐는데.


사와무라가 멋쩍게 말했다. 조금 우스웠다. 스가와라는 그가 백조로 태어났다는 것을 상기했다. 다들 그렇지. 스가와라는 말했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다들 자신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떤지는 관심 없었다. 그 어떤 구질구질한 사연도 스가와라만큼은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묵묵히 걸었다. 달빛에 그림자가 생겼다. 스가와라가 문득 말했다.


어릴 때 그림자를 보면 좀 무서웠어.

왜?

그냥. 나를 닮았는데 까맣잖아. 그리고 좀 더 진해보여서. 그래서 이상했어.


그런데 그냥 살다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달빛이 어린 스가와라의 그림자를 비췄다.


나는 여기서 자랐어.


그래서 그냥. 이제는 좀... 잘 모르겠네. 말이 어정쩡하게 끝을 맺었다. 습관처럼 입꼬리가 끌려 올라갔다. 머리카락이 눈을 가렸다. 사와무라가 걸음을 삐끗했다.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약국 간판이 저 멀리 시야 끝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런데 사실 아직도 가끔 내 그림자가 남들보다 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기지. 평소보다도 낮은 목소리였다. 사와무라는 몇 번인가 걸음을 멈췄고 몇 번인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사와무라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가 도로 멀어지는 것을 스가와라는 계속 보았다. 서툰 몸짓이었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가 누구를 위로해 본 적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더 진해지는 게 싫으면 빨리 나가. 


목소리에도 그림자가 졌다. 스가와라는 괜한 소리를 한 것을 후회했다. 너무나도 유치한 말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건 태양을 보고 자란 사람에 대한 열등감일까. 혹시라도 사와무라가 대답할까봐 두려워서 재빨리 약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사와무라는 천천히 뒤에서 걸었다. 신중한 걸음이었다. 그것마저도 스가와라는 갖지 못한 것이었다.




*


스가와라는 아무렇지 않게 사와무라에게 계산을 떠넘겼다. 손에 들린 까만 비닐봉지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와무라가 큼큼, 목을 다듬었다. 어쩐지 싫었다. 


나는.


사와무라의 목소리는 그림자가 없다. 스가와라는 사소한 것에서 패배감을 느꼈다. 


처음에 여자친구가 여기서 일했어.


여자친구? 스가와라가 눈을 돌렸다. 사와무라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은 가지고 있으면 소중하지 않다고 여겼다. 분명 스가와라 자신도 아마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것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태양을 보고 자랐을 사와무라라는 것이 스가와라를 놀라게 했다. 사와무라는 스가와라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바보같지.


스가와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괜히 바닥을 구두로 몇 번 찼다. 코가 금방 더러워지면서 흙먼지가 작게 일었다. 그냥 걔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었어. 걔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랐거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걔가 여기서 죽었어.


그 전에는 그래도 언젠가 여기서 나가야겠다, 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그냥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들면서 내가 밖에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어. 사와무라는 그림자도 없이 웃었다. 어둠조차 없어서 더 쓸쓸한 웃음이었다. 스가와라는 손을 뒤로 감췄다.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스가와라는 자신 역시 서툰 사람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와무라가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스가와라의 기분도 바닥으로 처박혔다. 쌩쌩 찬바람이 불었다. 사와무라, 모르는 모양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아파.


그러니까 그런 바보같은 소리 하지 마. 스가와라가 딱 잘라 대답했다. 찬 공기가 다시금 스가와라를 쓸어갔다. 쓸려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와무라가 스가와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람과 다르게 따뜻했다. 무거운 숨을 쉬는 사람들의 심장은 빠르게 뛰는 모양이었다. 그래, 정말로 사와무라는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외부인이다. 이방인이다. 그는 공유할 수 없다. 


스가와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온기가 돈다. 숨이 스가와라의 피부에까지 닿는다. 스가와라는 제 성이 그렇게 다정한 이름이었던가 생각했다. 아니면 이것 역시 그가 철저한 외부자이기 때문일까. 스가와라는 입을 애써 다물고 잇새로 새어나가는 바람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나랑 같이 나갈래?


그러면 괜찮을 것 같아. 이곳의 사람들은 쉽게 돌려말하고 남을 속였다. 거짓이 그들의 삶을 원색으로 포장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양지의 사람이라서 이곳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스가와라는 입을 벌렸다. 희망이 비누거품마냥 공중으로 퍼졌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것들이 입을 닫는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는 너무 오래 여기에 있었고 알코올 냄새가 나는 한 그가 여기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사와무라는 조금 더 빨리 말했어야 했다. 스가와라는 소리내어 웃었다.


내가 못 그럴 거 알잖아.

그게,


사와무라는 말을 멈췄다. 스가와라는 자신이 어느 순간 마담과 같은 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갈 거면 지금 나가. 지금이면 모르는 척 해 줄게.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갑자기 병이 심해진 기분이 들었다. 잡은 적 없는데 빼앗길 수가 있나. 머리를 짚었다. 사와무라의 그림자는 스가와라의 것보다 확실히 연하다.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응시했다. 어제 처음 마주한 눈은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들어가자. 


사와무라가 발을 내딛었다. 디딘 곳에 자국이 남지 않았다. 사와무라도 무게를 잃었다.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다. 스가와라는 사와무라가 디딘 곳을 골라서 걸었다. 공중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 영원히 부유하며 살아갈 것이다. 사와무라도 아마 그렇겠지. 뒷골목의 사람들에게 최선의 결말이다. 가게의 문에 달린 풍경이 울렸다.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신호였다. 경주가 끝났다. 내려앉지 못하는 숨이 공중을 맴돌았다.     







아 이렇게 나도 정체 모를 아 아아앙아 나는 병이 있어 쓴걸 다 올리고 싶어하는 병... 병이다... 이걸 왜... 아... 어떡하지... 나중에 수정하자... 아아아아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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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는 고개를 잠깐 흔들었다. 귀에서 이유 모를 사이렌 소리가 자꾸만 났다. 손 끝에서 붉은 피가 고여 팔이 흔들리는대로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오이카와는 누구의 피인지 상관하지 않았다. 눈 앞의 시체는 쓰러져있었다. 어둠 속인데도 유난히 밝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죽어가는 남자의 신음은 모든 소음을 뚫고 자꾸만 감미로웠다. 물들어버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어둠을 닮은 빛깔의 원단이 피를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노래는 아주 길었고 남자가 어떤 구조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기에는 넘치는 시간이었다. 충분하다, 라고 생각한 오이카와는 눈 앞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이건 어떻게 하지. 가까이 걸어가자 운동화가 끌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평소처럼 토막내서...


좀 아픈데. 


시체는 그렇게 말했다. 잿빛의 머리카락이 더러운 도로 위를 천천히 쓸었다. 팔 끝이 경련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어느곳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익숙한 이질감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닿은 곳들은 빛이 났다. 그의 젖은 청바지나, 새까만 아스팔트 길. 오이카와는 칼을 바투잡았다. 다시 찌를 기분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죽고 싶었다. 




*


바는 아주 조용했고 먼지마저 쌓여있었다. 오이카와는 자꾸만 청바지가 축축하다고 느꼈다. 남자는 지금의 상황만큼이나 기묘한 공기 속에 살았다. 매끈하고 마감이 잘 되어 어떤 부스러기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몇 번이고 들었다. 그 공기만큼이나 기묘한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스가와라라고 말했다. 스가와라. 오이카와는 그 이름을 알았다. 기실 이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이름의 그림자를 접하며 살았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신, 이라는 글자가 붙곤 했는데 오이카와는 이 도시의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그 수식어에서 언제나 이물감을 느끼곤 했다. 안드로이드가 산재한 이 과학 문명의 시대에 신이라는 존재를 섬기는 도시는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오이카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실물을 마주한 남자는 그 수식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건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상식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오이카와는 처음 이 의뢰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므로 경멸하는 외부자였고 그래서 쉽게 그 의뢰를 수락했다. 하지만 이럴 거라고는. 오이카와는 문득 물었다. 당신이 정말 신이라고?


아마 그렇겠죠. 남자는 조용히 웃었다. 그는 이 어둡고 먼지 쌓인 지하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처럼 뒷골목에 사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상식 외의 일이었다. 머리카락에 은사가 섞인듯 탁한 붉은 빛의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오이카와는 도무지 자신이 신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야? 조급한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낡은 운동화가 몇 번이고 헤져버린 바닥을 긁었다. 신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명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이카와의 젖어있는 손가락을 비췄다. 오이카와는 인간이라면 이럴 수는 없다, 라고 생각했다. 


저를 칼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 '신'은 그렇게 말했다. 존대하는 말이 어색해서 오이카와는 인상을 찡그렸다. 안일했다고 생각하는 말 끝은 연기처럼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신은 잠깐 말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저를 죽이려고 한 사람은 많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죽지 않아요, 저는. 신은 천천히 말했다. 발음은 사투리가 없고 명확했다. 오이카와는 인간의 상식을 가졌기 때문에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은 찔리면 죽는 존재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칼이 아니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인 걸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처럼 가까이 왔던 사람은 처음이에요.


남자의 시선이 다시금 오이카와를 훑었다. 굳은 살이 박힌 손가락 사이나, 팔뚝에 남은 자잘한 상처나, 머리카락을 길러 감춘 흔적들. 감추고 싶었던 것들이 전부 빛을 받았다. 오이카와는 일부러 턱을 괴고 자세를 무너뜨렸다. 세월이 쌓인 테이블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쳤어요.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보면 남자는 정말로 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그 흐름들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오이카와를 비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감히 뛰어들 수 없는 흐름이었다. 불가항력이라서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이 지하를 잔뜩 비추며 웃었다. 신일까.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는 어떤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건 터무니없을만큼 아무 내용도 없었는데 단지 스가와라를 지킨다, 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틀었다. 


지키는 사람은 지금도 많이 있지 않아?


오이카와는 그를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그를 본 적은 많았다. 그의 행적은 시시때때로 매스컴을 탔는데 그때마다 그는 운집된 군중과 셀 수 없는 보디가드들을 동반했다. 얼핏 보아도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아마 의뢰주가 그 스가와라의 이동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오이카와는 칼같은 수단을 사용해서 그를 없애려는 시도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금 말했다. 당신이 가장 가까이 왔기 때문이에요. 


무슨 뜻이야?


좀 제대로 말해. 덧붙는 말은 어쩐지 민망해져서 스러졌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지금 신을 윽박지르고 있는 것인가 고민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말 그대로, 당신이 가까웠다는 뜻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없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허허로운 말들이었다. 오이카와는 잠깐 망설였다. 여기에 말려들면 이상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는 법의 보호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이런 쪽에 민감하게 굴었다. 최소한의 호신장치였다. 남자는 미적대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나는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 아냐. 

상관 없어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말은 멋지게 완성되어서 리듬을 입은 상태로 태어났다. 참을 수 없게 매력적이었다. 생에서 만난 언어중 꼽을 수 있을 만큼 멋졌고 진폭이 커서 지반을 뒤흔들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그 말을 아주 오래 기다려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어쩔 수 없이 휘말려들었다. 서명을 하는 손은 침착했다. 혹시라도 지옥에 가게 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


한 달이 지났다. 오이카와는 남자의 지쳤다는 말은 언어 그대로 지쳤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끔 쉬었고 주로는 사람들을 만났다. 신은 정말로 바빴다. 구원이 필요한 도시는 하나 이상의 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위로의 포장지가 언제고 신전에 난무했다. 오이카와는 가끔 그가 몇명분의 구원을 더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자리를 뜨는 일이 드물었고 오이카와는 자신이 거의 신전 경비원이라도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대의 신전에 경비원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생활은 거의 비슷했고 오이카와는 이런 필요라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하고 가끔 불평했다. 신은 듣지 못할만큼 사소했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그 사소한 불만들이 어느덧 제법 쌓여 신전을 두드릴 높이가 되어갈 무렵 신은 오이카와를 불렀다. 


오늘은 말야, 비밀 외출이야.


그러니까 나를 스가와라라고 불러줘. 오이카와는 신이라는 호칭이 아직도 낯설었지만 스가와라라는 이름은 더욱 낯설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그를 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는 신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호칭을 꺼내기 위해서 애써야했다. 신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쓰고 신전의 옆 문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스가와라라고 불리는 존재에 대해서는 주로 잊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희미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몰라보는게 이상해?


눈썹이 잠깐 처졌다가 도로 올라갔다. 꺾인 부분이 있어 부자연스러웠다. 


이상해 할 필요 없어, 다들 그러거든.


저 사람들은 신이라면 상관 없어. 아마 내가 아니어도 상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말야, 사람이 견디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스가와라-는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말의 못갖춘 마디들에 관해서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스가와라는 다만 웃고 계속 걸었다. 걸음은 말만큼 느렸고 오이카와는 그저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는 자신이 보는 것들이 어쩐지 익숙한 모습들이라고 생각했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그릇 가게나 언제나 할인하고 있는 슈퍼마켓, 수리공이 없는 자전거 가게. 오이카와는 그가 향하는 곳이 처음의 그 장소라는 것을 꺠달았다. 그때도 여기에 가고 싶었을까.


사실 말야, 저번달에 갔어야 했는데. 스가와라는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그를 죽이고 싶어했던 때가 저번달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그 뒤로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고작 한 달이었다. 스가와라는 더 이상은 어떤 핏자국도 남아있지 않은 아스팔트 길에 서서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는 일견 평범한 회벽을 두드렸다. 비어있는듯이 가벼운 소리가 났다. 예상밖의 소리에 오이카와는 잠깐 놀랐다. 그때 어쩌면 자신이 위험했을 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회벽이 꺽꺽이며 뒤로 끌려나가고 스가와라는 그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들어섰다. 깜깜하여 안이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그곳에 들어가야 하는지 잠깐 망설이다가 발을 뻗었다. 




왔어?


그 안의 남자는 너무나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너무나도 평범한 어조로 말했다. 신이라 유명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치고는 너무나도 일상적이었다. 오이카와는 잠시 적응할 수 없어 어지러웠다. 남자는 오이카와를 고개로 가리켰다. 얘야?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쯧, 혀를 찼다.


괜히 일 키우기는. 얘기는 했어?

아직이요.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서 얘기 안 하면 어떡해?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흩뜨렸다. 나 미치겠네. 오이카와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몰라서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계속 열을 냈다. 


너 이러다가 말 새어나가면 곤란해. 

제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스가와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이카와는 인간적인 신의 일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다시 한숨을 쉬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벽 옆면에 있던지도 모르는 조그만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남자와 둘이 남은 오이카와는 자신이 이 기류에 빠지기만 하면 언제나 조난자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남자는 오이카와를 잠깐 흘겨보고는 도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너 말야, 정말 몰라? 꿍얼대는 불평이 짓눌린 종이들 새로 삐져나왔다.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침묵에 남자가 죽어가는 소리를 냈고 흐물거리는 손을 뻗어 책상 한 편의 버튼을 눌렀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우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둥이라고 생각했던 커다란 시험관이 껍데기를 열었다. 부품들이 차가운 소리를 내며 한 켠으로 말려들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보고 말을 잃었다. 스가와라?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찬 시험관 안에 스가와라가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대형 스크린을 조작했다. 시험관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품 정확도 94%, 회로 정확도 89%, 배터리 잔량 27%. 현재 충전중. 오이카와는 이번에야말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진짜 신을 만나게 된 것을 축하해. 남자의 목소리는 잿빛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오이카와는 말을 고르지 못했다.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이게 신이라는 거지.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구나.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확실히 스가와라는 자신과의 첫 만남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죽지도 않고 살아있지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신과 비슷할지도 몰랐다.


매달 이런 걸 하나요?


거의 매달. 저번달에는 일이 있어서 안 왔어. 남자는 대답했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시험관을 넘겨다보았다. 차갑고 조용한 곳에서 스가와라는 정지해 있었다. 자신이 찔렀던 곳에 액체들이 거품을 내며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신이란 이토록 가여운 존재였다. 그는 인간보다도 독자적이지 못했고 오로지 구원을 판매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의 자판기와 비슷한 메커니즘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안드로이드를 구원하는 신이 어딘가에 있을까. 혼자 지옥에 침몰하고 말 안드로이드는 왜 포기하지 않을까. 생각들은 가시가 많아서 쉽게 삼킬 수 없었다. 목이 자꾸만 따가웠다. 지쳤다고 했지. 스가와라는 지칠 자격이 없었다. 


왜 이런 걸 만들었어요,


신은 순식간에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자는 허하게 웃었다. 


안드로이드라도 좋다고 숭배한 건 인간인데 그 책임을 내가 져야 해?


차라리 3원칙에 의해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해칠 수 없으니까 사기는 안 쳐. 인간보다는 낫지. 남자는 말했다. 뿌리깊은 불신은 남자에게 있어서 스가와라에게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여태껏 얼마나 깊은 암흑을 걸었을까. 동정받지 못하는 양지의 삶이 자신이 살아왔던 음지의 삶보다 얼마나 불행한지 오이카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시험관 안이 검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문득 안드로이드가 절망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실망했어요? 스가와라는 물었다. 오이카와는 이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에 어떤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신 이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A-29 혹은 K-72는 스가와라와 무관한 넘버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왜 지쳤는지 알 것 같아. 


스가와라는 웃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웃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그 신전 안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웃음은 스가와라의 모든 부분과 같아서 느렸고 깊었다. 


천국은 어때?

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주지만 한 번도 천국에 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한 때는, 저도,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저는 죽을 수가 없어서. 스가와라는 손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오이카와는 문득 자신에게 스가와라의 스케줄을 보낸 모르는 의뢰주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신을 알고 스가와라를 몰랐다. 오로지 셀 수 있는 수만이 스가와라를 알았다. 오이카와는 말을 멈췄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너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신음같은 말이었다. 스가와라의 진의는 오이카와를 깊게 찔렀다.


아닌가요?


그는 정말로 지친 얼굴로 웃었다. 통상의 안드로이드는 배터리를 소모했고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괴로워 보였다. 오이카와는 문득 마음이 정말 아프다고 생각했다.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그는 끌려들고 말았다. 


고마워요.


흐느끼는 얼굴은 울음같아서 오이카와에게 흘러들었다. 깊이까지를 적셨다. 내가, 너를, 오래 지킬게. 오이카와는 그 말이 스가와라에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모조의 구원은 과시할 필요가 있어서 오래 빛났다. 죽음같은 밤이 삭막한 것들을 감췄다. 









이 뒤에 쓸 게 있는데 시간이 넘 없어서 구냥 올립니다... 나름 완결성이 있는 것 같아서(아님 아니라고) 나중에 뒤가 생길수더... 모르겟다 하지만 아무도 안 죽었다 그게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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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아픈 사람들과 고통의 소리가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전부 아팠다. 병원에 오면 안 그래도 비극이었던 내 이야기는 비극을 넘어서서 싸구려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스치는 공기조차 힘든 나에게는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그것을 저버릴 수 없어서 나는 여기에 이렇게 왔다. 어느새 눈에 익은 복도와 노란 선을 따라서 계단을 천천히 밟아 올라갔다. 체중이 무겁게 가라앉아 둔탁한 소리가 났다. 502호라는 문패는 이제 우리 집인 양 마냥 익숙하다. 문을 열었다. 그 안의 짙은 회색빛 공기가 순간 열린 문 틈 사이로 앞다투어 빠져나갔다가 도로 끌려들어간다. 여기는 이질적이다. 사람들의 세상과는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너를 본다. 가만히, 미동 없이, 모든 것이 갇혀버린 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너를 본다. 그 모습은 이제는 일상과 다르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늘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선들이 온통 너를 휘감고 있다. 나는 항상 네가 그 선들에게 양분을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습지도 않은 걱정을 한다. 그리고 네가 오늘은 눈을 뜨지 않을까, 나의 이 기다림이 끝나지 않을까, 헛된 기대 속에 잠겨서 나는 오늘도 아가미로 숨을 쉰다.    

-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얽힌 부분이 많아서 풀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엉킨 것들은 이미 하나로 섞여 있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그것들을 애써 갈라놓아야 하는 나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행복한 적이 있었니?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누군가를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행복한 적이 생으로부터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국이 여기야. 이정표가 없어도 모두들 알았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은 나의 죄였고 너의 죄였다. 우리는 도망칠 수 있을까? 죄 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



생은 늘 바라지 않는 일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늘 등 뒤를 주시하며 걸었다. 등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흘러내리는 진득한 피의 아득한 향에 정신을 잃는 것은 내게는 당연했다. 그것이 싫어 도망쳐 나온 곳은 온갖 거짓으로만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거짓을 얼굴에 두르고 나를 지웠다. 교복은 지워낸 것 중 하나였다. 가끔 길거리를 걸으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간대가 있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커다랬고 얼굴은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물건을 훔쳤다. 삶은 내게 이것보다 더한 짓을 되풀이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물건 몇가지를 몰래 가지고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돈을 보고 있으면 내가 가지고 가야 할 무게들이 한순간에 내게 내리꽂혔다. 늘 더해가기만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름 없는 것들로 세 개만... 지금과 넘 비슷하군요 눈물이 난다 올해가 2016년이니 5년 전... 성장이 없는 인간이다... 어휘마저 똑같아서 소름끼침 재능이 없는 수준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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