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이야."


뭔지 모를 작은 상자 모양의 기계를 앞에 두고 다이치는 그렇게 말했다. 진지한 표정을 슬슬 살폈다. 왕립협회에서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별 희한한 연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런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저 단단한 얼굴을 앞에 두고도 도저히 상식적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새삼스러워 올려다보자 시선을 슬쩍 돌린 다이치가 말을 이었다.


"이걸로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야. 아직 기초 단계라서 평행우주간에 간섭까지는 못해. 원리는 뭐 얘기해줘봤자 이해 못 할 것 같으니까 넘어가고, 아무튼 이걸로는 확인밖에는 할 수 없어. 어떻게 보면 재연 기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너에게는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아. 


"너한테 충분히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 연구들은 협회 거야. 나중에도 내가 이런 기회를 줄 수 있다고는 말 못해."


이건 거절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이치는 '그' 사건이 나를 얼마나 좀먹었는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일 터였다. 그러니까 이런 기회를 만들었겠지. 허공에서 터지던 불빛이 아직도 선명했다. 전쟁터에서 폭발은 수없이 많았지만 그만치 새빨갰던 불빛이 있었던가. 총을 겨누는 그 사람의 분노에 찬 눈빛마저 늘상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알아야 했고 기억해야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전쟁이 눈 앞에서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빨간 버튼을 누르면 이동이야. 그리고 돌아오는 건 초록색. 기다릴게.'

현재의 시간에서 들었던 마지막 목소리가 귀에서 쟁쟁 울렸다. 누군가가 아주 세게 머리를 후려쳐 기억이 든 상자가 넘어지기라도 한 것 같은 메스꺼움이었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다이치가 말했던 대로 나는 아마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전함 한바닥에 머리를 감싸쥐고 널부러져 있는데도 아무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유령의 기분을 실컷 만끽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수 없이 많이 보았고 경험했던 공간인데도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것만으로 색다른 기분이 들다니. 열맞춰 걸어가는 일정한 발소리도 오랜만이었다. 아마 저 마크는 72부대였나? 대충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지금 아주 적절한 시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절하다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폐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 과거에 떨어졌는데 그 과거가 바로 사건 당일이라니. 거기다가 시간도 애매하다. 다섯 시간 정도 남았나? 시간을 셋팅한 다이치를 원망했다. 진짜 사실만 확인하라고 보낸 거야 뭐야! 살아있는 카게야마 구경도 좀 하게 해주지. 울컥 밀려오는 걸 애써 가라앉혔다. 내가 지금 찾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카게야마였다.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더 급했다. 아마 이 시간에는 비행 훈련이었나? 카게야마는 유독 그걸 좋아했었다. 우주 한 가운데 버려진 기분이 든다고 했었나. 나는 그 사건 이후에 버려진 기분을 아주 많이 느꼈는데도 그런 기분이 왜 좋은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의외로 어른스러웠었나... 처음에 듣고 역시 부잣집 도련님, 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났다. 우주 비행을 연습할 수 있는 일반 가정집이라니 말도 안 돼. 나중에 말하기로는 아버지가 군인이라고 하셨었다. 끌려나오는 생각들이 끝이 없다. 전부 무시하고 비행장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전투기에 탑승하는 카게야마가 아주 작게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뒤로 따라붙어 전투기 내부에 몸을 구겨넣고 나자 다른 반갑고도 슬픈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안녕 502 부대원들. 내가 너희를 버리고 살아남은 스가와라 중령이다. 아무도 듣지 못할 인사를 마음 속으로 했다. 


전투선을 아무리 둘러봐도 과거의 나는 여기 없다. 나는 이때 왜 훈련에 빠졌더라? 생각해 내려고 하면 순식간에 생각이 난다. 아마 이 기억도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서 같이 도매금으로 묶여 들어갔었나보다. 나는 이 시간에 A대령의 집무실에 있었다. 그랬지. 이건 아주 돌발적인 사건이었고, 또... 신체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서 A대령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목을 깨물고 도망쳤었나... 이건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도망쳤었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 과거의 카게야마를 택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함선이 부유하자 병력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카게야마는 사령석에 앉는다. 나는 그 얼굴을 조금 오래 쳐다보았다. 곧 몇 시간 후면 나에게 총을 겨눌 얼굴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사랑하는 얼굴. 그래 내가 저 단호하고도 어린 얼굴을 사랑했었어. 유령은 울 수 있을까?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참았다. 아무래도 유령은 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화면을 확인하면서 명령을 내리는 선은 부드럽고 함선의 주포가 주황색 불빛을 내는 것과 화면의 빨간 점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동시다. 아마 오랫동안 훈련받아서 체득한 것일 터였다. 나는 끝까지 어설픈 군인이었는데 나보다 계급도 낮았던 주제에 저렇게나 익숙했다. 내가 있었을 때는 내가 했을 일이었으니까 미처 몰랐지.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화면에 크게 개인통신이 뜬다. 카게야마가 통신을 개인 단말기로 전환했다. 지휘는 자연스럽게 중사가 이어받았다. 유령은 남의 대화를 흔적없이 훔친다. 조금 다행이었다.


- 카게야마 소위입니다.

- 카게야마, 나야. 훈련은 잘 하고 있니?

- 무슨일이세요 이번엔.

- 아 다른게 아니라. 카게야마 네가 502부대 맞니?

-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전화할게요.

- 아니, 다른게 아니라 전출 신청을 하는게 좋겠다고 아버지가 그러시네. 부대 섬멸령이 있었다는 것 같은데?

- 네?

- 부대장이 밉보인 것 같다고 그러시던데... 잘은 모르겠네. 

- 그런 일 없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카게야마가 툭하니 전화를 끊었다. 그토록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상황의 전말이 전화 한 통으로 설명될 간단한 일이었다. A대령이 무슨 수를 썼겠지. 소문이 더럽기로 유명했었다. 이건 막을 수 없는 재난이다. 전화를 끊은 카게야마가 톡톡 의자를 두드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웃음에 내리는 것은 절망이었다. 괜찮아요. 누구에게 하는 말일지 모를 말이 카게야마의 입술 사이에서 나와 함선을 떠돌았다. 갑자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겪었던 컷이 몇 개 흘러간다. - 중사님, 이건 반역입니다. 이 함선에는 오르실 수 없습니다. 지휘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화난 눈. 총을 든 손이 떨리고 있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과거의 내가 달려드는 앞에서 함선의 문이 닫힌다. 이미 만신창이였어서 그 안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던 시간들이 지금 이렇게 흘러간다. 방관자의 눈으로 보면 이렇게나 명확했었는데. 이미 비극인 걸 아는데도 막을 수 없다는 데서 또 하나의 비극이 탄생한다. 네가 나에게 희생할 기회를 줬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니. 아 카게야마, 카게야마... 이름이 입 속에서 구른다. 유령이 죽을 수 없다는 것은 통탄스러운 일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불가역적이라서 나는 속죄하지 못했지. 못 다 떨쳐낸 아픔이 늘 내게 머무르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한 번 쓸었다. 과거의 스가와라는 함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스가와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스며들듯이 그 옆에 선다. 여기서는 어떤 후회가 끼어들 수 없다.




함선이 크게 흔들렸다. 빨간 것들이 한번에 눈 앞에서 번지고 흐른다. 과거의 내가 올려다보는 가운데 현재의 나의 장례식이 치러진다. 상처입을 수 없는 몸으로 여기 존재하는데 이렇게도 아프다니. 너는 얼마나 아팠어? 너는 울지 않았니? 카게야마가 앉아있던 사령석도 흔들리며 무너진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카게야마 옆에 가만히 누웠다. 너의 아픔을 공유하고 싶어. 존재하지 않는 몸이 가만히 입술을 겹친다. 산자의 숨이 가만히 가만히 흘러들었다. 이건 어떤 위로이자 어떤 속죄였다. 함선이 다시금 쿵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동력이 정지한 모양이지. 아무래도 상관 없다. 죽은듯이 눈을 감은 얼굴을 보았다. 

스가와라 중령님. 

아주 가느스름하게 열린 입술 사이로 말이 샌다. 이건 유언일까.

여기 있는 거... 압니다.  

갑자기 호흡이 조금 힘들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건 무엇이길래 너는 지금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걸까. 

사랑해요.

안에 쌓아오던 무엇이 터졌다. 내가 지금 너를 안고 있는데 너는 모르지. 너는 혼자 남겨졌던 나보다도 외로웠구나. 사랑이라고 마지막에 말할만치 외로웠구나. 

카게야마, 나도 그래.

이건 닿지 못할 속삭임이다. 끝없는 숨을 타고 흐르는 끝에 나는 여기에 도착한 거야.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경유해서 여기 있지. 그러니까 여긴 미래인 거야. 차츰 숨이 멎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바야흐로 종말이었다.










전력해보고 싶어서 썼는데 혹시 누군가 보신다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모르셨겠지만 배경 우주임 놀랍죠 생각보다 시간 없어서 끝갈수록 망함.... 용두사미도 아니고 사두사미인듯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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